정치인·관료로는 위기 돌파 못해
기업인 '돌발적 사고' 분출시켜야"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 안현실 기자 ] “우리나라 운명을 바꿀 기회의 땅입니다. 어디에나 모래·자갈 같은 건설자재가 널려 있어 건설공사 최적지입니다. 뜨거운 낮엔 에어컨 켜놓고 자고, 선선한 밤에 일하면 됩니다. 물은 탱커로 길어오면 되고 사회간접시설이 없으니 그걸 건설해 주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우리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도 주게 될 것이니 이런 천혜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 중동에 나가야 합니다.”
1970년대 1차, 2차 오일쇼크로 중동 산유국이 외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당시 한국은 외화 부족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때 기업인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동으로 가서 건설공사로 외화를 벌자”고 말했다. ‘역발상’이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시대다. 문서적 학습과 이론이 얼마나 허망한지, 르네 데카르트처럼 ‘끊임없는 회의(懷疑)’로 의심하고 또 의심해도 부족할 판이다. 기업인은 “불확실성을 절감한다”고 토로한다. 오직 권력을 가진 정치인·관료의 인식만 요지부동이다.
지난 6월 다우지수 구성 종목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요즘 말이 아니다. 최고경영자(CEO)가 취임 1년여 만에 교체됐다.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를 비판해온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GE다. 주식 소유구조가 가장 잘 분산된 기업, 창립자 가문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기업이 이렇게 됐다. 끝까지 살아남아 이익 내고, 일자리 만들고, 배당 주고, 세금 내는 기업의 지배구조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이 순간에도 지배구조 문제로 기업을 혼내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파괴적 혁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테슬라가 처한 곤경도 충격적이다. 기존 자동차 회사들의 전기차 공략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기존 기업이 파괴적 혁신으로 나오면 신생 기업보다 더 무섭다는 분석도 있다. 여기서도 정답이 없다. 국내 벤처는 “대기업과 손잡게 해달라”는데, 우리 정치는 “대기업을 빨리 망하게 해달라”고 고사라도 지낼 분위기다.
규제당국이 남의 나라 기업·기업인은 우러러보고 우리 기업·기업인은 아래로 보는 기업관도 문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미래를 봤지만, 네이버의 이해진은 그런 걸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잡스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했으면 김 위원장이 몸담았던 시민단체가 응원을 보냈을지 의문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미래를 보고싶어 하지 않는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국내 학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또 어떤가? 그들은 아마존이 성공한 사례만 말할 뿐 스마트폰·검색·경매 등에서 실패한 사례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규제 때문에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실패하면 바로 죽이려드는 나라에선 베이조스가 아니라 더 뛰어난 기업인이라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설비투자가 외환위기 이후 최장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고용 쇼크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급기야 한국이 고통스러운 저성장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까지 등장했다. 국가가 기업인을 업신여기고, 규제로 괴롭히고,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는데 성장엔진이 급속도로 파괴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정치인·관료가 위기의 한국 경제를 구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자기 이론에만 파묻힌 학자가 해낼 수 있을까? 조지 길더는 《지식과 권력》에서 의미심장한 힌트 하나를 던져 준다. “역발상 등 창조적 돌발성은 기업가적 과정에서 나온다. 관료주의에 의해 포착되거나 성문화되기 어렵다”고.
“기업인의 돌발적 사고, 역발상 분출이 곧 성장엔진”이라는 길더는 “국가 미래가 걱정되면 이 질문을 해 보라”고 말한다. “기업인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우리야말로 절박한 심정으로 던져야 할 질문 아닌가?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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