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1) 불순응(不順應)
자립하는 '개인'과 대중
타인의 말과 행동·모습을
탐닉하는 대중들과 달리
개인은 스스로를 응시하고
규범에 끊임없이 의문 제기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포고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이스메네는 전형적인 '대중'
오빠의 '無명예'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안티고네
누구나 개인(個人)으로 불리진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지녀야 개인이다. 자신의 고유성이 없다면, 그 인간은 대중(大衆) 혹은 대중의 일부일 뿐이다. 미디어와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같은 뉴스와 이미지를 보고 접한다. 도시와 도시문명은 인간에게 역설적이다. 그 장소는 개인의 최선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훈련장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개성을 잠식하고 대중문화가 의도한 인간으로 동화시키는 미궁이다. 대중은 타인이 전하는 뉴스를 통해 세계를 보고 그것을 통해 형성된 가치체계와 관습을 ‘진리’로 수용한다.
대중(大衆)
대중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감동적인 길과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한 ‘내면의 법’에 의존한다. 바로 개인이다. 사회는 내면의 법에 의존하는 소수의 개인을 혐오한다. 대중은 그 문화를 지탱하고, 그 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인 이익을 최적화한 관습으로 법을 만든다. 그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법’이라는 미명 아래 제거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이 세상의 어떤 원칙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바치는 순교자가 된다. 순교자에겐 명확한 삶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원칙이 있다.
현대문명은 이런 소수들을 격리하고 감금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감시와 처벌》(1975)이란 책에서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순화해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정기관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교정기관은 학교, 교도소, 군대, 정신병원과 같은 것이다. 대중문화를 조장하는 권력자들은 이 소수들을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사회에 적합하게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고취시킨다. 이런 교정기관은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이자 기술이다. 그들은 현대인의 삶을 촘촘히 감시하고 조절하고 연결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이끈다. 20세기 상반기에 일어난 대중운동들은 19세기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소수 권력층에 대한 항거로 시작했다. 독일의 나치스,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당 혁명 등이다. 대중운동을 표방하지만 소수 권력자들의 전략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사회운동이다. 21세기 러시아와 중국은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극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다.
자립(自立)
대중여론의 조작자들과 대중은 자신들의 의도를 알아차려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불순응자’들을 두려워한다. 불순응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 그들은 사회 규범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관을 고민하고 가장 자기다운 삶, 즉 진실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역동적으로 수련한다. 대중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미 정의된 명제나 관습이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불순응자들은 소수의 창조자들로 현실의 모호함을 기꺼이 포용해 그것을 기반으로 만든 개성을 만들어 간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의 법’이 ‘사회집단의 법’보다 상위이며 그들 내면에 존재하는 독특한 자기다움이 모든 사람들이 찬양하는 사회적인 우상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의지, 명료한 시선, 숭고한 생각이 규범이자 교리다. 불순응자는 자신이 어제까지 애지중지한 규범과 교리를 오늘이란 새로운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타인이 그를 반박하기 전에 스스로를 반박하는 역동적이며 모순적인 인간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자립’(1841)이란 글에서 소수의 ‘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적나라한 말로 당신의 생각을 말하십시오. 내일도 다시 적나라한 말로 당신의 생각을 말하십시오. 그 말이 오늘 당신이 말한 모두를 부정할지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사람들은 당신을 오해할 것입니다. 오해받는 것은 나쁜 것입니까?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과 같은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혼들은 모두 오해받았습니다.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오해받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평론가 콜린 윌슨(1931~2013)은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무의미성이라는 오류’ 안에서 헤매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은 사회 규범 안에서 연명하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진작시킬 신뢰를 상실하고 좌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회에 순응한다. 자립하는 인간은 고집이 세지만 건전하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자신을 응시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온전하고 스스로에게 정직하다. 그러나 사회에 의존하는 대중은 타인의 모습과 말, 행동에 탐닉한다. 심지어 타인이 먹는 음식과 옷에 열광해 그가 간 음식점을 찾고 그가 입은 옷을 구입한다. 자립하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흠모할 만한 거룩함을 찾지만, 대중은 누구에게나 알려져 흔하고 진부한 대상을 통해 자신의 부러움을 헛되이 찾는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딸인 안티고네는 운명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비극적인 인간이다. 그녀에게 아버지 오이디푸스는 동시에 오빠다. 오이디푸스가 오빠라면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그녀에게 언니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로 상징되는 가문을 대신해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에 참신한 가치를 선물할 것이다. ‘안티고네’라는 그리스 이름은 ‘~에 대항해, ~을 대신해’란 의미의 접두어 ‘안티(anti)’와 ‘자궁, 탄생, 어머니’를 의미하는 ‘고네(gone)’의 합성어다. 직역하자면 ‘어머니(부모)에 대항해’ 등장한 인간이다. 안티고네는 부모가 상징하는 과거의 폭력적인 신화에서 탈출해 아테네 도시문명과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가치를 표방할 개인이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막 시작한 도시문명과 그 문명이 상징하는 가치에 순응하지 않고 모호한 관계를 유지한다.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그 모호함은 기존 질서와의 전면적인 대결로 전개된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에서 그리스 영웅의 최고 가치인 ‘개인의 명예’의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들을 성대한 장례식과 기억을 통해 찬양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명예를 수여한다. 국장(國葬)은 영웅에게 마땅한, 고대 그리스어로 ‘티메(time)’라고 하는 ‘명예’를 추서하는 국가의례다. 안티고네는 이 도시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사회적인 절차를 사적이며 가족적인 절차로 도전한다.
안티고네의 오빠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내쫓고 테베의 왕이 됐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테베를 치리할 것을 약속했다.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내놓지 않자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가서 반란군을 규합해 테베를 공격했다. 안티고네는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를 떠나보내고 급하게 테베로 돌아온다. 오빠들이 전투를 벌이다 둘 다 전사할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테베의 왕은 외삼촌 크레온이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왕권을 이어받아 왕으로서의 적통을 테베 시민들로부터 부여받아야 한다. 그는 에테오클레스를 위해 성대한 국장을 마련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핵심인 ‘명예’를 회복할 셈이다. 테베를 초토화시키려했던 폴리네이케스는 크레온에게 명예를 훼손하는 반역자일 뿐이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궁전 앞에서 시작한다. 안티고네는 테베로 먼저 돌아온 동생 이스메네를 만날 참이다. 안티고네는 이스메네를 이름으로 부른다. “이스메네, 나의 동생, 나의 어머니의 친자식!”(1행) 안티고네는 테베를 장악한 크레온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테베를 지키기 위해, 에테오클레스를 위해 싸운 ‘장군’(그리스어 스트라테고스)으로 부른다.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에게 크레온이 도시 전역에 내린 포고(布告)를 아느냐고 묻는다. 이스메네는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스메네는 전형적인 대중의 표상이다.
안티고네가 말한다. “크레온이 우리 두 오빠 중 한 사람을 위해선 명예를 가져다주는 장례를, 다른 사람을 위해선 ‘무(無)명예(아티마사스, atimasas)’를 명령했단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에테오클레스 오라버니는 정당한 법도와 관습을 준수해 장례를 지내 지하에 있는 죽은 자들 사이에서 ‘명예(엔티모스, entimos)’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폴리네이케스의 불쌍한 시신을 묻거나 애도하는 사람은 형벌을 받는다는 법령이 내려졌어. 그를 위해 우는 사람도 없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지도 않아. (폴리네이케스는) 배고픔을 달래는 새들의 먹이가 될 거야.”(21~30행)
크레온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국장을 통해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도시문명의 법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인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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