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지식인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입력 2018-10-11 18:32  

"편협·비방·무기력·침묵…토론 실종
책임없는 空論家·에듀테이너 득세
지식인 침묵은 사회 제동장치 고장"

오형규 논설위원



[ 오형규 기자 ] 지식인 사회가 위태롭다. 학계는 입증 없는 주장이 난무하고, 싱크탱크들은 논란 있는 이슈에 입을 닫은 지 오래다. 기성 언론이 외면당하고, 법조계도 제 코가 석 자다. 토론장(場)은 직설적 비난이 넘쳐나는 SNS로 대체됐다. 나라 걱정에 한숨이 커지는 한편,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공직 예비군’이 즐비한 게 요즘 지식인 사회다.

안팎 상황은 엄중해져만 가는데 지식인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 비상등 켜진 경제, 대안 부재인 탈원전, 점점 뒤처지는 미래산업, 알고도 손 놓은 노동개혁, 북한과의 최근 관계가 진짜 평화인지 가짜 평화인지 등에 대해 그저 멀찍이 지켜볼 뿐이다. 정보가 민주화되고, 활자에서 영상시대로 넘어간 탓인가. 스스로를 직업인 수준으로 낮추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무엇이 위기를 불러왔을까. 여론 주도는커녕 추종에 급급한 탓일까. 10여 년 전 한 언론이 지적했듯, 지식인 하면 네이버 ‘지식iN’을 연상하고 지식이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돼버린 탓일까.

교수들에게 들어봤다. A교수는 “주장해봐야 정권이 귀 막고 안 듣는다는 무력감에다, 대학 연구소 등 지식인 서식지들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부수업무에 함몰돼 현실인식이 떨어진 탓이 크다”며 ‘지식인이 숨어버린 사회’라고 규정했다. B교수는 “대학가에는 실제로 현 정부에 호의적인 교수들이 많고, 정권의 높은 지지율을 의식한 자기검열 측면도 있다”고 진단했다.

C교수는 “소신을 밝히면 SNS를 통한 무차별 집단공격으로 상처받는 탓에 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럴수록 더 의도적인 공격이 가해져 재갈을 물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좌파 지식계는 지금 정치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입지를 넓히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는 반면, 우파 지식계는 ‘내가 나서봐야 되겠나’라는 자포자기가 팽배하다”고 덧붙였다. 생전 처음 대중의 비난을 경험한 법조인들이 잔뜩 움츠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부만 열심히 한 ‘겁많은 범생이’가 지식인인가.

지식인이 위축될수록 ‘유사(類似) 지식인’이 득세한다. 유시민 최진기 설민석 등 에듀테이너들은 ‘모르는 것 빼고 다 안다’는 듯이 방송을 누빈다. 진지한 토론과 성찰이 필요한 영역까지 책임없고 편향된 공론가(空論家·이데올로그)들의 차지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건강한 담론이 나올 리 만무하다.

어수선한 시대에 지식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티브 풀러 영국 워윅대 교수의 다섯 가지 조언을 곱씹어 볼 만하다. ①판단력을 잃지 말고, 다양한 관점을 보라 ②어떤 매체든 기꺼이 생각을 전달하라 ③어떤 관점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마라 ④자기 의견은 타인의 의견을 강화하기보다 균형있게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라 ⑤공공 사안의 논쟁에선 진리를 위해 끈기있게 싸우되, 자기 주장이 오류로 판명나면 정중히 인정하라.

유감스럽게도 한국 지식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덕목이다. 편협하고 낡은 지식을 절대진리인 양 고집하고, 대선캠프에 수백 수천 명이 줄 서고, 표절하면서 오류는 인정 않는 풍토다. 10여 년 전 베네수엘라를 배우자던 학자들, 한·미 FTA가 매국 협상이라던 교수들 중에 누구도 잘못을 시인하는 걸 못 봤다.

‘가방끈’이 길다고 지식인이 아니다. 학자의 양심, 법관의 불편부당, 작가의 문제의식은 진실을 대하는 태도에 기반한다. 역사에 기억되는 지식인은 어두운 밤에 외로이 등불을 들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고발한 에밀 졸라, 폭주하는 사회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경고한 레이몽 아롱이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아무리 포퓰리즘 시대여도 진실은 다수결로 정해지지 않는다.

지식인이 비판의식을 잃으면 짠맛 잃은 소금과도 같다. 할 말을 하지 않으면 지식인이길 포기한 것이고, 거짓으로 대중을 호도하면 그 자체로 범죄다. 지식인이 침묵하는 나라는 제동장치 없이 비탈길을 내달리는 것과 다름없다. 지식인 위기가 곧 대한민국의 위기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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