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대일외교, '감정'보다 '사실' 앞세워야

입력 2018-10-11 18:48  

김동욱 도쿄 특파원


[ 김동욱 기자 ] 1906년 일제 통감부는 경기 수원에 농업시험장을 설치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뒤에는 조선총독부가 이 시설을 앞세워 ‘우량 품종’ 쌀 보급을 꾀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와세신리키(早神力), 야마구치현의 고쿠료미야코(穀良都), 도치기현의 다마니시키(多摩錦) 같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은 품종의 쌀을 들여온 것이다.

1920년 무렵엔 한반도에서 이들 우량 품종이 전체 쌀 생산의 62%를 차지했다. 그리고 1910년대 초 1200만 석 수준에 머물렀던 쌀 생산량은 1937년엔 2700만 석으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만연한 '일본 만악설(萬惡說)'

일본산 쌀이 한반도에 널리 퍼지는 데는 일제의 강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 미약했던 행정력을 고려할 때 생산자(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신품종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급속한 일본 쌀의 확산은 불가능했다. 재래종에 비해 생산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품종은 그렇게 시장에 퍼졌다. 오늘날 한국 닭고기 소비의 90% 이상을 사육생산성이 좋은 미국산 코니시 교배종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사(농업사) 교과서 한구석에 적혀 있을 법한 케케묵은 얘기를 다시 꺼낸 것은 최근 국내 방송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일제가 수확량이 적은 토종 벼 품종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쌀을 보급했다”는 식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집어삼키기 바빴을 20세기 초 일본이 토종 벼 말살을 고민할 정도로 치밀했을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토종 벼 퇴출을 다룰 때 드러난 감정적인 ‘일제 만악 근원설’이 사회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한 ‘욱일기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인의 집단기억 속에 욱일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기분 나쁜’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 각국 군함이 모이는 관함식에 참여하려던 일본 함정에 “욱일기를 달지 마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비판은 사실에 근거해야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 영국 같은 나라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과 적잖은 차이가 있다. 일제 만행을 직접 겪지 않은 탓인지, 반(反)인륜적 인종말살 정책을 수행한 나치 독일과는 다르게 취급한다. 2차 세계대전 후에도 독일군 상징으로 사용된 철십자 마크처럼 욱일기를 일반적인 군대 표식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범기’라는 단어가 최근 5~6년 새 한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욱일기 퇴출 주장이 해외 여론의 공감을 얻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은 일본이 1952년 욱일기를 해상자위대기로 선정했을 때도, 1998년과 2008년 관함식에서 욱일기 게양함선이 입항했을 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괜찮았고, 이번엔 안 되는 객관적 이유를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이런 논란으로 얻는 실익은 무엇인가.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도 ‘독도 새우’로 소동이 빚어진 적이 있지 않았던가.

오랫동안 한국에서 일제 혹은 일본은 악마적 존재로 그려졌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본이 반성·사과하는 것을 원한다면 그들도 납득할 만한 사실에 근거해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져 보면 ‘사실’만으로도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지나치게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한국에도 이롭지 않다.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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