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에 앞서는 양심…안티고네 "비열하게 죽고 싶진 않아"

입력 2018-10-19 18:50   수정 2018-10-19 19:59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3) 불복종(不服從)

깨어있는 개인과 대중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개인
사회의 동력을 유지하는 힘
다수결은 최선의 선택 안돼

언니 외면하는 이스메네
"불행한 가문…조용히 살아야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여성들은 순응하는 피지배자"

안티고네의 용기
유일한 핏줄도 외면하는 행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택
"나는 내 오빠를 매장할거야"



개인의 숙고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수 없을 때, 그 개인들은 자신의 불안감을 ‘대중(大衆)’이라는 거대한 가면에 씌워 힘을 규합하고 팽창한다. 깊은 생각을 연습하지 않고 육신의 편안함과 자극에 탐닉하는 대중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한 독재자는 미디어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며 개인의 소수 의견을 다수결 원칙에 따라 무시하거나 묵살한다. 정보기술(IT) 세계에선 그런 조작이 더욱 용이하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는 거룩하다. 그 의견은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원하는, 양 떼와 같이 순응하는 대중을 일깨우는 총성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최적의 해결책을 찾으려 고군분투할 때 비로소 인간이다. 국가는 그런 개인들이 상충하는 의견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경청과 토의를 통해 최선을 이끌도록 독려하는 터전이 돼야 한다.



대중(大衆)

역사는 명료한 정신과 그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의지를 실현하려는 용감한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진한다. 자주적이며 독립적이고 특정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공평한 인간이 선진적인 문명과 문화의 기둥이다. 만일 한 사회가 그런 개인들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력을 잃고 소멸할 것이다.

한 사회의 의미심장한 변화는 항상 개인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의 청원이나 다수결을 통한 결정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그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견이나 욕심에 근거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대중으로부터 혹은 대중의 힘을 얻은 권력에 의존하는 행위는 개인이 지닌 고유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직무유기다. 한 국가의 수준은 개인의 수준이다. 국가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한 개인의 사사로운 태도가 국가의 좌표를 제시하고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두 자매 중 이스메네는 대중에 대한 은유이고, 안티고네는 개인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여자예요.”

안티고네는 자신의 양심대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할 참이다. 안티고네의 삼촌이며 테베의 왕인 크레온은 테베를 공격한 폴리네이케스를 도시문명의 근간인 양보와 협동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반문명적인 반역자로 여긴다. 그래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내다 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한다. 크레온에게 폴리네이케스는 문명과 문화가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동생 이스메네에게 도시문명과 문화의 법보다 중요한 양심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자고 권유한다. 이스메네는 이성적이며 사리에 밝은 도시 여성이다. 그녀는 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한다.

“언니,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이스메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반대한다. 그 이유들은 대중이 지닌 무기력함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핑계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메네는 자신의 가문을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마주친 반인륜적인 비극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두 눈을 상하게 해 장님이 된 후 증오와 멸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다. 그러니 이스메네에겐 어머니이자 할머니다. 그뿐만 아니다. 두 오빠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권력에 눈이 멀어 전투를 벌이다 한날한시에 서로를 살해했다. 이런 가문의 생존자인 이스메네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이스메네는 개인으로서 개인의 집합체인 도시의 법과 도시 권력의 상징인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빠들처럼 도시의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는 일은 반문명적이며 어리석은 처사라고 판단한 것이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은 비참한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개인은 도시 안에 살면서 안전, 교육, 정체성 확보와 같은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다른 시민들처럼 튀는 행동을 삼가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스메네의 이런 주장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에게 언도된 사형을 기꺼이 승복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 사형 언도를 거역하는 일은 아테네 도시문명과 정신을 파괴하는 반역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시민으로서 누려온 다양한 혜택을 상기하며 감옥 탈출을 종용한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이 악법인 줄 알면서도 국가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테네의 위대함을 유지하는 것이라 해석했다면, 안티고네는 개인의 양심이 국가권력보다 앞서는 가치라고 주장한다.

셋째,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의 제안을 거절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명심해야 해요. 첫째, 우리는 여자예요. 남자들과 싸우도록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다음으로 우리는 더 강한 자(남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만큼 이번 일은 물론이고 더 괴로운 일이라도 복종해야 해요.”(61~64행) 이스메네는 남성이 가정, 사회, 도시,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자며 여성은 남성의 명령을 받고 순응하는 피지배자라는 가부장적인 세계관을 지녔다. 그런 사회 통념이나 구조는 바뀔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과 같은 일개 여성은 그런 틀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최선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스메네에게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 테베의 전통과 법, 그리고 남성 권위주의의 상징인 크레온의 명령은 평가를 넘어선 절대적인 선이다.

“나는 오빠를 매장할 거야.”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득한다고 해도 이스메네의 마음과 세계관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티고네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너는 너 좋을 대로 생각해. 나는 그분(폴리네이케스)을 매장할 거야.”(71행) 안티고네는 자신의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실천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것은 탁상공론이자 거짓이다. 생각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그것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된다. 안티고네는 테베에서 그런 자신의 행위를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이스메네조차 자신의 제안을 두려워하며 거절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말은 종말론적이다. 그녀의 말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런 말과 행동은 죽음조차 초월한다. 안티고네는 말한다. “그렇게 한 후, 내가 죽는다면 얼마나 훌륭하냐?” 여기서 ‘훌륭하다’는 ‘칼론(kalon)’이란 그리스어의 번역이다. 칼론은 좁은 의미로는 ‘숭고한’ ‘훌륭한’이란 뜻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탁월한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칼로스 카아가쏘스(kalos k’agathos)’다. 카아가쏘스는 ‘카이 아가쏘스’의 축약으로 ‘그리고’를 의미하는 접속사 ‘카이’와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용사 ‘아가쏘스’가 합쳐진 단어다. ‘칼로스 카아가쏘스’의 의미는 ‘탁월하며 정직한’이란 의미다. 칼론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명사로도 사용되지만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섬세하고 탁월한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로도 쓰인다. 멋진 의상과 현악사중주도 칼론이며, 그 옷을 적절한 상황에서 입고 행동하고, 현악사중주의 연주가 감동적으로 표현되는 과정 또한 칼론이다. 안티고네는 오빠를 매장하는 행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런 자신의 행위는 ‘거룩한 범행’으로 세상의 어떤 권력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49년 ‘정부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란 에세이를 썼다. 소로는 이 에세이 내용을 1866년에 강연한 후 제목을 ‘시민 불복종’으로 수정했다. 이 글은 미국 정부와 정책, 특히 당시 미국의 행태인 노예제와 멕시코 침략전쟁을 다뤘다. 그는 정부가 대중으로부터 권력을 보장받는다고 주장한다. 대중이 가장 합법적이고 정당한 해법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소로는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개인의 권리를 ‘불복종’이라는 주제를 통해 주장했다. 기원전 5세기 안티고네는 인간 누구에게나 부여된 ‘양심’을 불복종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스메네는 자신이 여자로서 ‘도시’의 뜻을 거역할 힘이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반면 안티고네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아무리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비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아.”(96~97행)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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