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 말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게 '언어게임'이죠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 언어관에서 ‘그림’에서 ‘게임’으로의 전환은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이다. 그는 후기에 오면서 자신이 그토록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시 철학계로 발을 돌리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아직 철학계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문제를 파악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크게 잘못됐다고 비판한 일상 언어에서 나왔다. 새로운 관점에서 일상 언어를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획일적인 법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한 양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한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그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에게 “나 배고파”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그림 이론에서라면 ‘나 배고파’란 말의 의미는 ‘나’는 현재 배고픔이란 상태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렸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언어 게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우스운 설명이 될 것이다. ‘나 배고파’라는 말은 엄마에게 “빨리 밥을 줘”라고 요청하는 말일 뿐, ‘나’가 현재 느끼는 배고픔 상태를 지시해 보여 주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의 그림 이론이 간과한 점이다.
철학계로 돌아오다
비트겐슈타인이 떠났던 철학계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언어관에 대한 그의 새로운 철학적 통찰에 기인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뒤 출간된 《철학적 탐구》는 언어관에 대한 그의 새로운 통찰인 ‘언어 게임’ 이론을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여기서 언어 게임이란 언어라는 것은 문맥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언어가 의미가 있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에서 정한 규칙에 따르듯이 언어가 사용되는 세계의 다양한 삶의 양식이라는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잘못 사용되고 이해돼 철학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봤다. 당시의 많은 철학적 문제 역시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이해한 결과라고 그는 파악했다. 그래서 그에게 철학은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사용된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 일, 즉 사람들의 생각을 분명하고 확실히 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언어 게임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서로 상황과 맥락에 맞게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제대로 말을 주고받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 미국에서 생활하다 한국에 돌아온 어떤 아이가 부모에게 학교에 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 사정을 들어보니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시켜서 영어책을 읽는데 뒤에서 친구들이 “죽인다 죽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아이의 영어 발음이 미국인과 같아서 친구들이 “영어 발음 죽인다 죽여”라고 칭찬한 것을 가지고 자녀는 이 말을 오해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그만 웃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맥락에 따라 위협적인 말도 되고, 칭찬의 말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 즉 언어의 쓰임새가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가 아니라 콘텍스트(context)다’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그림이론에서 게임이론으로
일반적으로 철학자가 자신의 주장을 도중에 부정하는 일은 드물고 때로 억지까지 동원해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우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의 그림 이론에서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 철학의 언어 게임 이론으로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면서 전기에 자신이 취한 입장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철학을 개척해 언어 철학에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이런 그에게 일관성을 잃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 기억해주세요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맥락에 따라 위협적인 말도 되고, 칭찬의 말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은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 즉 언어의 쓰임새가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가 아니라 콘텍스트(context)이다’라는 말로 바꿔쓸 수 있다.
김홍일 < 서울국제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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