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아픔이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져
건강한 생활 위해 사회안전망 정비해야
김진세 < 고려제일정신과원장 >
인간의 정신은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행복한 사회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안전(安全)하고 안정(安定)돼야 한다. 안전해야 살아가기에 두려움이 없고, 안정돼야 미래상황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화재나 묻지마 폭행 같은 위협적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경제든 정치든 앞날이 불투명한 사회에선 정신질환이 늘어난다.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사회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유행(?)하는 정신 증상이 하나 있다. 눈만 감으면 억울함이 치솟아 올라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기도 하고 큰돈을 만질 기회를 막아버린 남편이 미워 허구한 날 다투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있기도 하고, 우유부단함에 계약을 미뤄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는 화병에 몸져눕는 이도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값 때문에 말이다.
중년의 직장인 A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팔아버린 아파트 가격이 ‘억(億)소리’ 나게 치솟자 병이 나고 말았다. 판단을 제대로 못한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팔지 말자고 반대하던 아내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사실 지나친 욕심이 화근일 수도 있다. 구입 당시보다 많이 오른 가격으로 팔아서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음에도 놓쳐버린 수억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화장실만 가면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봤지만 의학적 검사로는 복통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침마다 화장실만 가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는데도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니 더 걱정됐다. 차라리 무슨 병이라고 알면 치료 가능성에 희망을 걸 수 있으련만 유명하다는 의사들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병에 걸려 결국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편히 쉬라며 일반적인 위장약 몇 알을 처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며칠 병가(病暇)를 내고 쉬면 나을 병”이라며 꾀병 취급을 하기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은 A씨는 언뜻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평생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한순간의 판단 실수로 날려버렸고, 한국인의 우울증 증상 중 제일 흔한 것은 우울한 기분이 아니고 ‘가슴 답답함’과 같은 신체적인 증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인터뷰와 심리검사 결과를 보면 우울함은 그리 깊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우울증과 달리 회사 일도 그럭저럭 문제없이 하고 있었다. 우울함이 고통의 핵심은 아니었다.
A씨는 ‘정신신체장애(psychosomatic disorder)’를 앓고 있었다. ‘신체화(身體化) 장애’ 또는 ‘심신증(心身症)’이라고 불리는 병이다. 이 병의 원인은 격심한 스트레스다. 갈등, 좌절, 낙담, 상실 등 정신적 고통이 몸에 나타난다. A씨처럼 위장관계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심장의 이상을 호소하거나 어지럼, 호흡 곤란은 물론이고 성 기능 장애로 나타나기도 한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니 흔히 꾀병이라고 오해하지만 신체화 증상은 꾸며낸 것이 아니다. 정말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A씨는 자신이 겪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상담과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약물 처방을 받고는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졌다. 더 이상 자신의 판단 실수를 탓하거나 복통으로 고생하지 않게 됐다. 물론 다른 정신건강 문제처럼 정신신체장애 역시 스트레스로 인해 재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속적인 스트레스 관리와 건강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수도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값이 치솟는 아파트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말 행복한 사회라면 땅을 산 사촌이 축하받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 이 나라 구석구석 사회안전망이 확립되고 삶의 안정을 위한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 해결이 어렵지 않게 되면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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