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학 교육강화 추세에 역행
'국력 기초' 수학 소홀땐 미래 없어"
차병석 편집부 부국장
[ 차병석 기자 ] 요즘 서울 학원가에는 일본 대학 진학을 준비시키는 유학전문학원들이 성업 중이다. 극심한 취업난을 피해 구인난인 일본으로 ‘취업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에 이어 아예 대학부터 일본에서 다니겠다는 학생들이 늘고 있어서다. 일본 대학 입학을 위한 일본유학시험(EJU) 응시자 수만 올해 6월 기준 3669명으로 지난 5년 사이 세 배로 증가했다.
이렇게 늘어난 일본 유학시험 준비생들이 가장 애를 먹는 과목은 일본어가 아니라고 한다. 수학과 과학이라는 게 유학전문가들 얘기다. 일본 유학시험의 수학과 과학이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고교에선 가르치지 않는 범위가 포함돼 있고, 문제의 깊이도 깊다. 일본 고교에선 그만큼 어려운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도 2000년대 초반 ‘유토리(ゆとり·여유) 교육’이란 걸 시행했다. 학생들의 과도한 입시경쟁과 학습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초·중학교 수업내용을 30% 줄이고 시험 문제도 쉽게 냈다. 그 결과 학생들의 학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쇼크’를 경험한 뒤 2007년 유토리 교육을 완전 폐기했다. 학교에선 다시 수학·과학 교육을 강화했다. 지금 일본의 대입 이과시험에는 기하·벡터뿐 아니라 한국 교육과정엔 없는 복소평면·극좌표 등도 출제된다. 문과 시험에서도 미적분을 비롯해 심화 수준의 수열과 공간벡터 내용까지 평가한다. 일본은 2020년도 대입 시험부터는 서술형 수학문제까지 출제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은 일본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입 시험을 개편할 때마다 수학과 과학 과목의 범위를 줄이고 문제를 쉽게 내도록 하고 있다. 2017학년도 수능 수학시험에선 행렬이 빠졌다. 2021학년도 수능에서는 기하(幾何) 부분도 빼기로 했다. 기하는 공간의 개념을 다루는 것으로 과학기술의 기초 소양이라며 학계가 강력 반대했지만 결국 제외시켰다.
명분은 지나친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막기 위해서라고 정부는 설명한다. 일반 고교에서 소위 수포자(수학 포기자) 과포자(과학 포기자)가 늘고 이에 따른 사교육이 성행하자 수학·과학 시험을 쉽게 내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은 가면 갈수록 ‘수학·과학을 안 하는 나라’가 돼 가고 있다”는 한탄이 과학기술계에서 터져 나올 정도다.
지난 십수년간 중·고교 교단에서 수학과 과학 과목은 ‘쉽게 쉽게’만 강조돼 왔다. 학생들의 기초 학력이 떨어진 건 당연한 결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5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보면 한국 고교생들의 성적은 역대 최하위로 동아시아 국가 중 꼴찌였다. 한국은 2000년 평가에서 과학이 1위, 2006년 평가 때는 수학이 1~4위로 최상위권이었다. 하지만 2015년 수학은 6~9위, 과학은 9~14위로 추락했다.
대학의 이공계 학과 교수들은 1학년 수업에 들어가면 당연히 고교에서 익혔어야 할 수학·과학의 기초를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어서 당혹스럽다고 한다. 급기야 일부 대학은 이공계 신입생들에게 입학 전 기초수학·기초물리 등의 예비과정을 이수시키고 있다. 이것도 못 따라가는 학생들은 대학 수업을 위한 과외까지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 나라의 수학·과학 역량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돼 있다는 건 긴 설명이 필요없다. 수학·과학 실력이야말로 그 나라의 과학기술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3D프린팅 등 신기술의 바탕엔 기하의 감각이나 방정식 등 수학 실력이 필수적이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영국 중국 등이 최근 부쩍 수학·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대입 시험 난이도를 높이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가 지금처럼 학생들에게 쉬운 수학·과학만 가르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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