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공모전 당선작
여행기 공모전 2등상
커피 한잔해! 코피 둘루
인도네시아
커피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때론 농크롱(nongkrong: 인도네시아 말로 ‘휴식’, ‘잡담’이라는 의미이다)을 하면서 노천카페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뭔가를 생각할 때나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하고 싶을 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김없이 “코피 둘루(Kopi Dulu: 커피 한잔해)” 또는 “미눔 코피(Minum Kopi: 커피 마셔)”를 외친다. 그래서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곳이 천국이다.
천년의 고도 족자서 마시는 커피
인도네시아는 커피의 어머니이자 젖줄이고, 커피의 민주공화국이며, 커피향이 짙은 말 그대로 커피의 나라, 그 자체다. 많은 커피노동자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로로 길게 늘어선 17000여 개의 인도네시아 섬을 보면 서쪽의 아체, 수마트라를 원산지로 하는 커피부터 덴파사르의 발리 커피 그리고 동쪽의 관문, 술라웨시를 대표하는 토라자 커피까지 많은 지역에서 그들만의 특색 있는 맛의 커피를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토라자 커피를 좋아하고, 즐겨 마신다.
나는 내가 거주하던 마카사르의 많은 카페를 돌아다니며 커피를 마셔봤다. 왜냐하면 커피를 내리는 사람의 마음이나 장소에 따라 같은 커피도 다른 향과 맛, 분위기를 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커피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자주 마신다. 그 무엇도 첨가하지 않은 커피 본연의 맛을 느껴봄으로써 카페와 바리스타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카사르에 다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자와 지방의 중심지이자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고 알려진 족자카르타(Jogjakarta: 족자카르타 또는 요그야카르타라고 부른다. 줄여서 사람들은 보통 ‘족자’라는 애칭으로 부른다)에서 1년을 산 적이 있다. 족자카르타는 관광책자에서 흔히 소개하는 말로 ‘천년의 고도’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주에 비견되기도 하는 곳으로 네덜란드의 식민 침탈 시대에 맞서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곳이며 인도네시아의 옛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고대 유적지와 사원이 많고,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보호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곳이다. 또한 보로부두르 사원(Temple Borobudur: 인도 굽타 왕조 양식의 영향을 받은 불교 사원으로 세계 3대 불교 유적 중 하나이다)과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힌두 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을 비롯해 건축적인 완성도가 돋보이는 사원들이 여전히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공부하며 체험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관광객에게는 필수 방문 코스로 알려진 곳이다.
커피는 물론 음식에도 단맛 넣는 자바인
게다가 소가죽으로 만든, 신화 속 다양한 모습의 화려한 문양과 색깔이 특징인 그림자 인형놀이 와양 쿨릿(Wayang kulit)이 그들 삶 깊은 곳에 하나의 대중적인 문화로 깊이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또 자와 지방 중에서도 교육열이 높고, 유명한 대학이 많이 몰려 있어 인도네시아 각지의 학생과 해외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도시 인구와 지역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라서 보통 ‘학생들의 도시(Student’s City)’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그곳에서 인도네시아 전통염색 기술인 바틱(Batik)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족자카르타를 포함한 주변 지역, 그러니까 솔로(Solo)와 세마랑(Semarang)으로 대표되는 자바인들의 음식은 아주 달다는 것이 특징이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얼큰한 국물이 속을 풀어준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음식이 좀 안 맞을 수도 있다. 물론 절대적인 의견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족자 사람들이 자랑하고, 즐겨 먹는 나시 구덱(Nasi Gudeg)이라고 하는 음식도 단맛이 강하고, 심지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도 “설탕 넣지 마세요(Tidak Paket Gula)”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커피 속으로 시럽이나 설탕을 두 스푼, 세 스푼씩 빛보다 빠른 속도로 넣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인도네시아 생활의 일부인 커피
나는 그곳에서 살 때, 항상 ‘제발 설탕 넣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가끔 그 말을 까먹는 날에는 커피인지 설탕물인지 모를 검은 음료를 한 잔 앞에 놓고 마실까 말까를 고민했을 정도다. 길거리의 조그만 슈퍼에서도 커피를 주문하면 즉석에서 커피를 타 주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인스턴트 커피는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이미 그 안에 달달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당분이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평소보다 곱절의 인심을 뽐내며 커피에 물을 넣고 ‘휘휘’ 저으며 또다시 설탕 두 스푼을 ‘팍팍’ 넣어 주시는 모습에서 조용하고, 소심하고, 부끄러움 많은 자바인들의 성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행동에서 과감함과 단호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족자에서는 깊고, 쌉싸름한 향의 커피를 맛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마카사르는 전반적으로 음식도 아주 달거나 맵지 않고, 카페의 사람들은 외국인인 나에게 커피의 취향을 잘 물어봐 줘서 이곳에선 항상 질 좋은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커피는 말 그대로 인도네시아 생활의 일부다. 도시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카사르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지에서 온 이방인인 나에게도 그것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 된다. 최근 몇 년 사이 마카사르의 골목 이곳저곳에서도 한국처럼 우후죽순 많은 카페가 생겼다가 몇 개월 만에 망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다른 커피숍이 생기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커피를 사랑하고 커피숍을 사랑방처럼 여기기에 벌어지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학생들은 커피숍에서 연애를 한다. 연인들은 저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남자들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인도네시아의 정치를 말하고, 아마 어떤 이들은 대학 시절의 나처럼 예술을 논하며 누군가와 설전을 벌이기도 할 것이다. 술문화가 없는 이곳에서 커피가 담긴 잔에는 수만 가지의 고민과 농담,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카사르 사람들의 목을 축이고, 가슴을 검게 적시는 커피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삶을 써내려가는 잉크가 아닐까.
신정근 hoelun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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