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지음 / 쌤앤파커스 / 263쪽│1만5000원
[ 은정진 기자 ]
![](https://img.hankyung.com/photo/201811/2018110862141_AA.18206434.1.jpg)
많은 사람이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시만 ‘기계적으로’ 읽어왔다.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이 단어가 내포한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이 답을 찾기 위한 질문에 익숙한 채 시를 접했다. ‘이 시인은 어떤 기분으로 시를 썼을까. 왜 썼을까’라는 생각 대신 시의 정답만 찾는다.
그렇게 시에서 정답을 찾아온 사람들은 시를 ‘뜬구름 잡는 얘기’ ‘이상적인 얘기’ ‘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세상’으로 여긴 채 마음에서 놓고 살아간다. 하지만 광고 문구, 표어, 포스터가 주는 정보나 교훈적 메시지와 달리 어느 순간 시를 읽으며 울컥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맞아 나도 지금 이런 마음이야’ 하는 생각에 시구를 천천히 읽고 또 곱씹어본다. 시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쓴 뜨거운 감정이 숨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론인’이라는 호칭 앞에 ‘시인’이라는 말을 먼저 붙이는 걸 더 좋아하는 저자 고두현 씨가 우리가 몰랐던, 또 가슴으로 느꼈으면 좋을 만한 명시를 한데 모아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를 내놨다. 단순히 시만 넣은 게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몰랐던 시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마음속에 그려지는 회화적 이미지를 천천히 또박또박 풀어낸다.
제목처럼 책은 유일한 사랑, 비운의 사랑, 위험한 사랑,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 등 다양한 사랑에 대한 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민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혁명가 곤의 거부에도 ‘하늘의 융단’이란 시를 통해 끝까지 유일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친 청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에선 그 숭고한 사랑의 감정에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겨운 순애보로 서로에게 평생 힘이 돼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와 괴테가 편지지에 은행나무 잎 두 장을 붙여서 보낸 사연도 흥미롭다.
사랑과 관련한 시만큼이나 인생과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도 있다. 소주 빈병을 입으로 불어 나는 소리를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로 들었던 시인 공광규의 시 ‘소주병’엔 자식과 부모를 모두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50대 아버지들의 애환이 묻어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의 시들 역시 잘 익은 운율과 달관적 화법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지난날을 추억하게 한다.
각 부에 들어 있는 ‘여백’ 같은 하이쿠(5-7-5의 17자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홍시여 잊지 말라/너도 젊었을 땐/떫었다는 것을’이란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에서 짧지만 촌철살인의 지혜와 통찰을 엿보게 된다. 저자는 “시는 주변 풍경뿐만 아니라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가던 길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면 그동안 잊고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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