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34)] 이문구 '유자소전'

입력 2018-11-12 09:01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대범하고 넉살좋은 유자
총수의 최측근 물러난 뒤 운수업체·병원 등에서
아무 대가없이 성자처럼 약자를 돕는다

작가는 유자의 벗인 자신의 대리인 화자를 통해
실존인물인 유자를 공자·맹자처럼 존경

작가는 유자를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유자소전’은 전기문 형태의 소설이다. 유자의 본명은 유재필이며 화자의 벗이다. 그리고 화자는 작가 이문구의 대리인이다. 이문구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벗의 일대기를 소설로 기록하였으되 유재필을 공자, 맹자와 마찬가지로 유자라 칭하여 존경의 염을 표현하고 있다. 유재필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존경을 받는가?

유자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대범하고 넉살 좋은 그는 나이가 한참 위인 중학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냈고 선생님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왕성한 활동력 때문에 차분하게 앉아 있지 못했던 그는 뼈가 여물기도 전에 학업보다 직업을 생각하였다. 영사 기사가 되고 싶어 무급으로 조수 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배운 확성기 배선 기술로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어느 후보의 확성기를 고쳐주었고 이 일을 계기로 선거운동원이 된다. 또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이른 나이에 어른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그 후보가 얼마 뒤 장관이 되고 유자는 비서관이 된다. 그러나 빛을 본 것도 잠시 정권이 바뀌자 장관이 몰락했고 오갈 데 없어진 유자는 입대한다. 이 호기심 많은 청년은 논산 훈련소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사주 책을 주워 읽고는 사주풀이를 한다. 원래의 왕성한 입담에 정치인 비서 시절 갈고닦은 말솜씨까지 더해졌으니 족집게 도사가 따로 없다. 신병 훈련이 아니라 동양철학자 노릇으로 바쁜 군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가히 풍운아다. 이 풍운아는 뛰어난 운전 솜씨 덕분에 10대 재벌에 드는 그룹 총수의 운전수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러나 총수의 최측근이라는 자리에 연연하며 살기에 그의 그릇은 너무 컸다. 거침없는 생각과 당당한 행동은 총수 앞에서도 위축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총수가 비싼 값으로 수입한 비단잉어가 죽자 고이 묻어주기는커녕 매운탕으로 끓여 먹는다. 평범한 직장인의 몇 년 치 월급으로 비단잉어를 키우는 총수의 사치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총수 자택의 불당에서 불상의 얼룩을 침을 뱉어 닦다가 총수의 노여움을 사서 운수업체의 노선 상무로 발령을 받는다. 노선 상무는 그룹에 속한 운수업체의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말단 부서의 현장 실무자로 유배된 셈이지만 이 자리야말로 구름 같이 떠돌던 혈기 방장한 괴짜 청년을 위대한 인간 유자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자리라 하겠다.

그는 삶의 구석구석을 몸으로 익히고 살아온 자의 경험과 지혜로 맹활약을 한다. 환자의 문병과 신속한 치료 조치, 사망자에 대한 넉넉한 부의와 정중한 조문, 장지까지 따라가서 장례를 거드는 성의와 적극적인 피해 보상 이행에 이르기까지 그는 완벽했다. 피해자 가족은 그에게 늘 고마워했다. 가해 차량의 회사 사람이 고울 리 없지만 자신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보태 주려고 보험회사와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 유자에게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자의 인간미는 가해자인 운전사들도 감동시켰다. 사건 처리를 위해 주소지를 찾아가 보면 그들은 대부분 딱하기 짝이 없는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용돈을 털어 쌀을 팔아 주고 밀가루를 팔아주고 연탄을 들여놓아주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굴비 두름을 산비탈 셋방을 찾아가 매달아 주었다. 이것은 약자를 사랑하는 진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선행이다.

유자의 이런 면모는 성자에 가깝다. 그러나 유자의 진짜 매력은 그를 성자라고 부르기 망설이게 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정형의 호방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호방함이 강렬하게 드러난 사건은 그가 어느 종합병원의 원무실장으로 근무할 때 일어났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 무렵 시위 중에 다친 사람들이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대거 찾아왔다. 가진 것 없는 환자들이 치료비가 있을 리 없고 노사분규로 해고된 사람들이니 회사에서 치료비를 부담할 리 없다 판단한 병원장은 그들의 입원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유자는 원무실장의 권한으로 그들을 입원시키고 치료받게 한다. 병원은 환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거듭 말하였고 책임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 당직 의사만 나오는 일요일에 치료비 없는 환자들을 탈출시킨 것이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유자는 계산하지 않는다. 실업 이후의 가난도 자신이 입을 손해도. 그는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생애 내내 지켰다.

이문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약자를 돕는 유자를 존경하였고 유능하지만 아버지의 좌익 활동 경력으로 출세하지 못한 유자를 안쓰러워하였고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충청도 보령 사투리를 기막히게 구사하여 ‘말하는 방언사전’ 노릇을 해 준 유자에게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 벗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담아 이 소설을 썼다.

이 독특한 매력 넘치는 인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한 번은 육체가 죽을 때이고 또 한 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라고 한다. 작가가 벗을 기억하였기에 유자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죽지 않았고 또 이런 작품을 남겼기에 작가 역시 세상을 하직한 후에도 유자와 더불어 이곳에 계속 살아 있다. 풍운아이면서 성자인 이 독특한 매력 넘치는 인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우리 속에서 소중한 삶의 가치를 외면하고 소소한 이익을 탐하는 작은 인간들이 발호할 때마다 유자를 보라고 그 범하지 못할 기상을 본받자고 타일러 보는 것은 어떨까.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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