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 출발

입력 2018-11-13 19:24  

이경춘 < 서울회생법원장 leek@scourt.go.kr >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등록된 금융회사들의 가계대출 잔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814조원에 달했다. 2014년 말보다 약 195조원 증가했다. 이 금액을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해 11월1일 기준 전국 가구 수(2016만800가구)로 나누면 가구당 대출금은 약 4030만원이 된다. 이런 가계부채 규모는 어디까지나 금융사 대출금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 개인 간 채무까지 고려하면 과도한 빚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작년 한 해 동안 과도한 채무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새 출발하기 위해 법원에 회생절차나 파산절차를 신청한 개인은 전국적으로 12만6411명이다. 서울회생법원에 신청한 사람은 2만5485명이다. 절대적인 숫자만 보면 적지 않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 가계부채 규모에 대비해 보면 채무자 중 상당수는 여전히 법원의 회생·파산절차를 이용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힘겨운 상황을 버티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채권자들이 빚을 독촉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비교적 점잖은 채권자도 있겠지만 견디기 힘든 갖은 핍박을 불사하는 채권자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가가 마련한 합법적인 방법이 법률이 정한 도산제도인 회생·파산절차다. 과거 시골에서는 빚 독촉에 시달린 채무자가 야밤에 가솔을 데리고 도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른바 ‘밤 봇짐’을 싸는 야반도주다. 지금이라고 이런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돌려막기 식으로 새로 빚을 내 채무를 변제하는 굴레를 쓰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또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빚으로 고통받는 기간이 길어지면 가족끼리 갈등을 빚다가 가정 파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모두 제때 도산제도를 활용하지 못해 생기는 마음 아픈 상황이다.

법원이 운영하는 회생·파산절차는 국가의 공적인 구제제도다. ‘불량하게 남의 돈을 갚지 않고 떼어먹은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따라 법원에 의해 채무를 탕감받거나 청산하고 면책선고를 받음으로써 ‘떳떳한 사람’으로 새 출발할 수 있다.

회생절차를 밟았던 분 중 한 명은 “회생계획 인가결정을 받은 날부터는 불면의 밤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 말이 인상 깊게 남았다. 아직도 과다한 채무로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이 법원을 통해 새 출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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