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노위, ILO협약 비준 논의…노동법 개정 권고
해고자도 임금협상 참여…'정치파업' 일상화 우려
전교조 합법화 길 열려…공무원·교원 파업 가능
노조 전임자 급여 자율화…2010년 '급여 금지' 퇴색
최종석 노동전문위원
[ 최종석 기자 ] 정부 내 사회적 합의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옛 노사정위원회)가 논란이 컸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 노동계의 손을 들어줬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저지 등을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한 21일을 하루 앞두고서다.
20일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노사관계위)는 공익합의안을 마련하고,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이들 협약 내용과 상반되는 국내 노동법 조항의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노동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해고자 노조 가입, 전임자 급여 자율화 등의 허용이 골자다.
경사노위 권고안은 사실상 정부안
이번 합의안에는 정부의 입김이 반영됐다는 게 각계의 중론이다. 정부는 지난해 5월 국정운영 5개년 계획 등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다. 문재인 정부 정책의 하나인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여기에는 노동계의 오랜 요구사항이 담겨 있다.
ILO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균등대우의 4개 분야에 걸친 8개 협약을 말한다. 한국은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87호와 98호, 강제노동금지를 담고 있는 29호와 105호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공무원·교원의 노조 결성과 가입, 해고자의 노조 가입,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의 노조 설립 등에서 국내법과 ILO 협약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이들 법 조항을 일괄 정비해 협약비준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한꺼번에 없애겠다는 정부 입장에 따라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화를 해왔다. 정부는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경우 ILO 핵심협약 준수가 대부분 반영되는 등 이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FTA를 체결한 미국도 ILO 핵심협약 중 6개를, 일본은 2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노사관계 지각변동 예고
합의안은 법외노조인 전교조에 합법화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작지 않다. 산업계에도 큰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노조 전임자 급여 자율화나 해고자의 노조 가입 허용, 특고 노동권 보장 등은 그간 기업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형성돼온 한국 노사관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우선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가 흔들리게 됐다. 이 제도는 기업 단위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노조 전임자 급여가 과도하게 지급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2010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도입했다. 전임자 급여 지급을 자율화하면 강성 노조가 전임자 급여를 과도하게 요구하더라도 사용자들이 반대할 제도적 장치가 사라진다. 늘어난 노조 전임자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노조 계파 간 선명성 경쟁이 심해질 우려도 제기된다. 선진 산업국가에서 노조 전임자의 급여는 대부분 조합비로 충당되며 사용자로부터 경비를 지원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게 노사관계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정치파업’ 일상화 우려
해고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되면 사업주와 종업원 간 단체교섭 테이블에 해고자 및 실업자 등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정치파업’이 일상화될 가능성도 커진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노조권이 강화되는 만큼 사용자의 방어권도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부당노동행위 제도 개선 등을 요구해왔지만 노사관계위에서 논의조차 없었다.
노사관계위는 경영계 2명, 노동계 2명, 정부 1명, 공익위원 8명(위원장 포함), 경사노위 간사 등 총 14명으로 구성됐다. 지난 7월20일 이후 12차례 회의를 거쳐 이번 공익위원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공익위원 가운데 2명을 제외한 대다수가 친 노동계 인사여서 ‘운동장 자체가 기울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재계 “노조 리스크 가중”
경제계의 우려는 크다. 가뜩이나 높은 인건비와 과격한 노조, 각종 규제 폭탄 등에 짓눌린 상황에서 ‘노조 리스크’만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해고자를 노조에 가입시키고, 전임자를 늘리자는 건 ‘노조 천국’을 만들자는 얘기”라며 “기업마다 습관성 파업에 매몰돼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업들 사이에선 이미 친노동정책과 규제 폭탄으로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인데 또 하나의 ‘메가톤급 폭탄’이 떨어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이런 분위기에서 도대체 누가 신규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에 나서겠느냐”고 토로했다.
js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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