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기업 압박만 가하니 합의될 리 있나
獨 총리가 성사시킨 '아우토5000' 배우라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 김정호 기자 ] 요즘 유행하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화법’은 허탈하기 짝이 없다. 이용섭 광주시장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 얘기다. 무산 위기에 놓이자 한다는 말이 “내가 직접 협상단장을 맡겠다”였다. 협상 타결 불발이 “협상 당사자 간 신뢰가 깨진 탓”이라면서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합의를 막판에 뒤집은 것은 광주시다. 그런데 ‘당사자 간 신뢰’ 타령이라니. 게다가 그간 무엇을 했기에 다 끝난 판에 내가 단장을 맡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가. 사업 주체가 광주시다. 현대자동차는 광주시 소유 공장에 생산을 위탁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장이 스스로를 중재자로 생각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합의만 해오면 대폭적인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이다. 노동계가 쉽게 합의해줄 사안이라는 건가. 노동운동권 출신이 이렇게 말해선 곤란하다. 정부가 풀지 않으면 기업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다.
“조금씩 양보해서 함께 가는 게 좋다”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예 “현대차가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주길 부탁한다”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발언은 더 걱정스럽다. 1998년 현대차가 8189명을 정리해고 하려던 때의 기억이다. 여당인 국민회의의 노무현 부총재가 울산공장에 엿새를 머물며 회사의 양보를 요구했다. 어쩌겠는가. 정리해고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는 또 어땠나. 정부는 파업 때마다 회사에 타결을 압박했다. ‘괴물 노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초임 연봉 3500만원, 주 평균 근로시간 44시간, 그리고 경영 안정을 위해 5년간 단체교섭을 유예한다.’ 광주시의 제안에 현대차가 할 만하다 해서 이룬 합의다. 광주시가 그걸 뒤집은 것이다. ‘현대·기아차 노조Ⅱ’를 만드는 일에 현대차가 참여할 이유가 없다.
정부와 광주시는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업 자체를 현대차가 제안한 게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는 광주시가 제안한 것이다. 윤장현 전 시장이 아이디어를 냈고, 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사업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기업에 바가지를 씌우려 들지 말라.
솔직히 요즘 국내에 공장을 짓는 기업이 어디 있는가. 노조가 임원을 집단 린치해도 경찰조차 말리지 않는 나라다. 해외로 나가면 그런 꼴부터 보지 않는다. 게다가 조건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다.
광주시가 벤츠나 BMW의 공장을 유치한다고 해보자. 지금처럼 ‘투자 압박’을 해댄다면 얼마나 웃어대겠는가. 현대·기아차는 온갖 나라에서 투자 유치 손짓을 받는다. 칙사 대접이다. 미국의 현대차 앨라배마공장, 기아차 조지아공장부터 그랬다. 땅은 공짜이고 법인세는 20년간 면제 또는 감면이다. 지원금을 받아가며 고용만 늘려주면 된다. 차가 잘 팔리라고 광고비까지 대주는 지자체다. 주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뛴다. 광주시가 지금처럼 하니까 5년 연속 외자유치 전국 꼴찌 지자체인 것이다. 그래놓고 시민 궐기대회나 부추기고 있으니.
또 명심할 것은 일자리보다 급한 게 제조업, 특히 자동차산업 붕괴를 막는 일이다. 제조업이 몰락하면 일자리도 없다. 고질적인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깨뜨리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민의 공감을 얻은 프로젝트가 아닌가. 정부와 지자체가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광주형 일자리의 벤치마크는 독일의 ‘아우토5000’이다. 실업자가 500만 명에 이르던 1999년, 폭스바겐보다 20% 낮은 5000마르크 월급여의 자회사를 만들어 5000명의 실업자를 구제해보자던 프로젝트다. 노조는 당연히 반발했다. 하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끝내 타결을 이뤄냈고 결국 ‘아젠다 2010’이라는 노동과 복지제도 개혁에 성공했다. 슈뢰더 총리가 방한해 이런 얘기를 했다.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면 시대에 잡아먹힌다”고 말이다. 자신의 지지층인 노동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이뤘기에 지금의 독일이 있다는 이야기다.
선거에서 지고 싶은 정치인이 있겠는가. 슈뢰더는 다음 총선에서 패배했고 아젠다 2010의 과실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따내 장기 집권의 토대가 됐다. 그래도 그는 후회가 없다. 국익을 위한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할 뿐이다. 좀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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