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을 극대화해 적응해온 우리 의료계
'투자개방형' 변수를 발판 삼아 도약하길
방문석 < 서울대 의대교수·재활의학 >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난 5일 원희룡 제주지사가 중국 뤼디그룹이 투자해 운영하는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이를 계기로 투자개방형 병원이 국내 의료보험 및 의료 공공성, 의료산업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논란이 한층 가열되고 있다. 투자개방형 병원은 노무현 정부 때 논의가 시작돼 15년의 세월이 지난 끝에 이제야 시행되는 셈인데 찬성과 반대 어느 편에서도 만족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반복되는 논란을 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의료계 환경을 하나의 생태계로 보고, 이 생태계에 돌출된 한 변화가 의료계 진화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할지 예측해 보는 것이다.
의료 생태계의 환경 변화라고 하면 크게 국민건강보험 전면 시행, 재벌그룹의 대형병원 개설, 의약분업, 현 정부가 추진하는 비급여의 급여화 등을 들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은 보험당국도 인정하다시피 원가 보전이 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의료계는 건강보험이라는 처음 마주한 생태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경험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적응해 진화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들은 낮은 진료비를 상쇄하기 위해 진료 건수를 늘리고 비급여 진료를 확대했다. 개인 의원은 물론 3차 병원인 대학병원까지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외래 환자를 소위 ‘3분 진료’라는 방식으로 진료하며 제도에 적응해 나갔다. 한 환자를 깊이 있게, 전인적으로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지만 기본 역량이 우수한 한국의 의사는 선진국 의사에 비해 강도 높게 근무하면서도 월등하게 많은 임상 경험을 쌓았다. 미국 의사가 30분 넘게 진찰해도 진단하지 못하는 질환을 한국 의사는 척 보기만 해도 진단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하나는 주로 첨단 검사 위주의 비급여 진료를 늘려 병원 경영을 유지해 생존하는 방식이다. 이 또한 검사장비 과다 도입과 필요 이상의 검사라는 부정적인 측면 못지않게 긍정적인 진화에 기여한 점이 있다. 자기공명영상(MRI), 양전자단층촬영(PET) 등 영상의학, 핵의학 분야는 단기간에 세계를 선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재벌의 대형병원 진출은 우리나라 병원의 대형화와 효율 극대화란 경영기법 도입의 계기가 됐다. 그 결과 같은 병상 규모의 선진국 병원과 비교하면, 매출은 5분의 1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 건물 외관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로비는 화려하기가 선진국 대형병원 못지않게 기형적으로 진화했다.
기존 대학병원들도 생존을 위해 이들 재벌이 세운 대형병원의 경영기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결국 원래의 설립 목적대로 진화하지 못하고 대형화와 효율 극대화에 치중해 생존에 매달렸다. 마른 걸레도 또 짜는 방식의 대형병원의 경영 효율화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한 듯하다.
의약분업도 의료 생태계를 크게 흔든 제도였다. 의료계는 낮은 의료수가에 따른 적자를 메우기 위해 약품 원내 처방에 의한 보상에 의존했다. 그런데 의약분업 도입으로 약품 원내 처방이 끊긴 것이다. 그 결과 의약분업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파업을 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어야 했다. 의약분업을 위한 준비가 소홀했던 탓에,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안정되고 공고하게 자리 잡은 의료 생태계에 개입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의료를 둘러싼 제도, 재정 등 생태계에 치밀한 계획 없이 개입할 때마다 생태계 구성원의 진화와 생존 방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책 설계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 의료계는 갈라파고스 섬처럼 그동안 외부로부터의 큰 충격 없이 정부가 조성한 환경에서 보험제도, 의료기관, 의료인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고 진화했다.
이제 의료 생태계에 외국인 환자 전용 투자개방형 병원이 등장했다. 새로운 외래종이 의료 생태계에 끼어든 셈이다. 우리 의료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에 적응하고 진화해 나갈지 이제는 공정하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큰 이해 당사자는 우리 국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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