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성을 원하는 기업 요구 반영해
제조업도 살린 교육혁신 주목을"
윤계섭 < 서울대 명예교수·경영학 >
“대학의 미래는 이곳에 있다.” 영국 웨스트미들랜즈 지방의 작은 도시 코번트리에 있는 워릭대 제조업그룹(Warwick Manufacturing Group, 이하 WMG)에 쏟아지는 찬사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WMG는 유럽 최고의 융복합학과 중 하나다. 자연과학과 공학, 경영학과를 한데 묶은 WMG의 성공 비결은 파격적 혁신이었다.
WMG는 대학과 기업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었다. 교육을 기업에 개방했다. WMG는 계획부터 평가에 이르는 전 교육 과정에 기업의 요구를 반영했다. 산업체 전문 인력을 교수진으로 대거 영입했다. 현장 및 실무 교육으로 학생을 실전형 인재로 키웠다. 타성에 젖은 기업 종사자들을 최신 기술과 경영 전략으로 재무장시켰다. 독특한 프로그램은 인기몰이를 했다. 기업인 대상 단기 강좌로 출발한 WMG는 학부와 대학원 그리고 중등교육을 아우르게 됐다. 싱가포르, 인도, 중국 등 7개국에 분교를 설립했다. 교육 개혁 정책을 영국 정부에 조언했다.
연구 활동의 주안점을 ‘시장성’에 뒀다. WMG는 ‘연구를 위한 연구’를 지양하고 상업성 창출에 전력했다. 산학협동 프로젝트 참여 업체들의 지식재산권을 인정했다. 영업비밀 유출을 막았다. 연구개발이 끝난 뒤에도 시장 반응을 체크하며 개선 사항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BAE, 롤스로이스, 제네카 등 영국 간판기업의 부활을 도왔다. 재규어랜드로버, IBM, 다이슨 등 글로벌 기업과도 파트너십을 맺었다.
“신성한 학문의 전당을 더럽힌다”는 비난과 맞서 싸우며 추진한 실험은 큰 성과를 낳았다. 워릭대의 도약을 이끌었다. WMG가 교육과 연구개발 사업으로 거액의 자체 수익을 거두며 10개 연구센터와 140여 개 하이테크 업체가 입주한 사이언스파크를 운영하게 되자 다른 학과들도 WMG를 벤치마킹했다. 그 덕분에 재정난과 학내 분규로 존망이 위태로웠던 워릭대는 환골탈태했다. 1965년 개교한 대학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 전통의 명문들과 함께 ‘영국의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러셀그룹의 멤버가 됐다.
제조업 르네상스를 견인했다. 몰락의 길을 걷던 웨스트미들랜즈 기업들은 WMG와의 협업으로 ‘제조업 3.0’ 시대를 선도하게 됐다. 제조업체들은 우수한 인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며 정보통신기술(ICT) 접목, 고부가가치화, 서비스업화 등 최신 트렌드에 발빠르게 대응했다. 세계 4대 회계법인 언스트&영은 잉글랜드 중서부 지역 제조업체들을 “영국 수출의 원동력”이라고 격찬했다.
WMG 사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의 대학 교육은 존폐의 기로에 서있다. 등록금에 의존하는 재정 구조와 등록금 규제 정책이 맞물려 많은 대학은 재정 위기에 처해 있다. 학령인구 감소도 걱정거리다. 교육의 질은 제자리걸음이다. 각종 국제 대학 평가 결과가 보여주듯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동량을 육성하겠다”는 다짐은 구호에 그친다. 학내외 이해집단의 반발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창조적 파괴가 절실한 순간이다.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9월 제조업생산지수는 전년 대비 1.5% 감소했다. 2009년 이후 가장 저조한 기록이다. 산처럼 쌓인 재고가 줄지 않는 가운데 국제경쟁력을 가늠하는 제조업경쟁력(CIP)지수는 뒷걸음질 중이다. 공장 가동률은 70%대 초반에 머물러 있고 투자심리는 외환위기 이래 최악이다. ‘한강의 기적’의 주역이었던 제조업이 경제난의 발원지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정부의 반(反)제조업 정책 재검토와 함께 내실 있는 산학협동을 통한 개방적 혁신이 요구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한국판 WMG’의 등장을 기대한다. 대학과 기업 간 소통과 공생을 막는 불신의 벽을 허무는 교육 혁명이 일어나기를, 이를 통해 고등교육과 제조업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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