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성 관심으로는 규제개혁 불가능"
“정부의 제대로 된 산업정책이 안 보여요. 첨단기술에 대한 지식과 민감도가 낮고, 창조적 기업활동에 대한 확신도 부족합니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주도하려 하죠.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사진)은 지난 26일 한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4차산업 정책을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자유한국당 입당 후 최근 당내 국가미래비전특별위원장을 맡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변할 한국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정책적 준비를 하는 역할이다.
오 위원장은 정부 산업정책 방향의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2019 경제정책방향’에 포함된 ‘인공지능(AI) 전문기업 100개 육성’ 같은 대목. 정부주도형 육성계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봤다. 그는 “AI 등 4차산업을 과거의 제조업 위주 아날로그형 육성책으로 지원할 순 없다”고 꼬집었다.
창의력과 속도로 승부하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오 위원장은 “정부가 끌고나가는 70년대식 사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제 정부는 기업이 시장이란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돌멩이를 제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4차산업 정책 방향 전환을 촉구했다.
- 4차산업 핵심인력들의 ‘두뇌 유출’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 이공계 인력이 가장 원하는 게 연구 자율성 보장입니다. 일본처럼 창의적 연구를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란 거죠. 이유가 뭘까요. 정부가 단기적 연구, ‘성공하는 연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장기적 연구, 실패할 수 있는 연구는 못하는 거예요. 단기 지표, 성과 지표 요구에 따라 과학자들은 연구보다 행정 업무에 시간을 뺏기고 있습니다. 두뇌의 해외 유출 현상을 금방 해결하긴 어려워요. 장기적으로 과학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합니다. 특이하고 독창적인 연구도 간섭하지 않고 오랜 세월 믿고 기다려주는 제도적 배려도 필요하죠.”
- 연구가 산업으로 이어지는 경로에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연구 결과를 스타트업으로 연계하는 법적·제도적 환경은 중국보다 뒤처집니다. 금융이나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독일처럼 학교에 있을 때부터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합니다. 산학연계를 충실히 하다보면 두뇌 유출도 자연히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전반적으로 고위공직자 중 이공계 비율도 낮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기술정책이 흔들리는 데 대한 불만도 크죠. 정책적 일관성과 이공계 의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 정부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기획재정부의 ‘2019 경제정책방향’을 보면 미래먹거리 중 하나인 블록체인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요.
“올 초 가상화폐(암호화폐) 열풍이 일자 법무부 장관까지 나서 규제하려 했잖아요. 그 배경에는 비트코인을 사기극으로 보는 좌파 지식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가 이런 분위기죠. 현 정부는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의 다른 적용 영역, 예컨대 행정·복지·의료 등을 구분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나무와 거기에 피는 꽃의 관계로 볼 수 있거든요. 선진 각국은 블록체인이란 범용기술을 산업적으로 활용해 ‘신뢰사회’로 바꿔나갈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국 모습은 답답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사회 변화를 실제로 경험하면 정부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를 걸고 있어요.”
- 정부는 규제혁신 한다고 하지만 현장에선 규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빅데이터는 개인정보보호법, 바이오는 의료법이나 약사법, 핀테크(금융기술)는 금융 규제에 막혀요. 블록체인 사업은 아예 계좌를 만들 수 없어 고사 직전인 상황입니다.
“모든 규제는 만들어질 때 나름의 이유가 있죠. 문제는 기술이 발전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산업 환경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규제는 그대로라는 겁니다. 시장 환경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다시 모바일로 바뀌고 있어요. 그런데도 규제는 안 바뀌고 있어요. 결국 불필요한 규제로 남아 신산업을 질식시킵니다. 아무리 정부가 규제 혁신을 외쳐도 규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또 다른 원인은 강고한 기득권과 카르텔입니다. 현 구조에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산업을 반기지 않겠죠. 저항이 셀 수밖에 없습니다.”
-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지도자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형태의 규제 철폐가 필요한 이유를 가슴으로 이해하고, 매일 챙기면서 관료 집단을 압도하려면 자기확신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야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처가 가능합니다. 규제 철폐에 대한 저항은 일회성 관심 표명이나 단편적 대처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어요. ‘규제 프리존’ 같은 특별법도 이러한 시도로 볼 수 있지만 지도자의 의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 블록체인을 활용한 행정효율 개선, 사회적 비용절감에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블록체인은 신뢰의 기술이면서 국민 편익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온라인상 문서에 대해 오프라인 종이 문서와 같은 법적 효력을 인정한다면, 많은 게 달라지겠죠. 예를 들면 주택청약을 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건강보험증 사본, 소득 증빙서류, 소득세 납부 입증서류, 혼인관계증명서 등이 필요합니다. 온라인상 원본 증명을 통해 기관 대 기관이 본인 동의 하에 공유하게 한다면 얼마나 편리해지겠습니까. 블록체인을 활용해 정부기관이 가진 정보를 위·변조 위험 없이 서로 공유하는 세상이 눈앞에 와있습니다.”
- 구체적인 4차산업 발전 방안이 있을까요.
“최근 정부가 내놓은 스마트 팩토리는 사물인터넷(IoT) 기반으로 기기들이 상호커뮤니케이션하는 연동 시스템입니다. 센서 기술과 빅데이터 토대의 공정 자동화를 뜻하죠. 따라서 공장 내 모든 데이터의 디지털화, 매뉴얼화가 급선무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소기업은 이 초기 단계 준비도 아직 부실한 형편이에요. 정부는 일단 개념 보급에 노력하고 기초를 다지는 데 에너지를 투입해야겠죠. 일정 기간 준비 단계가 필요합니다. 걷지도 못하는데 뛸 수는 없으니까요.”
- 4차 산업혁명이 큰 흐름이지만 결국 일자리를 줄일 것이란 비관론도 있는데요.
“1~3차 산업혁명을 겪으면서도 새 일자리가 창출돼 왔어요. 타이밍의 문제는 있습니다. 승자 독식의 4차 산업혁명에서 처지면 2류 빈곤국가로 전락할 위험이 있죠. 반면 앞서가면 조기에 일자리 대변혁을 겪는다는 게 딜레마입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미래로 가는 변곡점이 될 겁니다. 특히 현재의 청년세대가 겪게 될 노동환경 변화를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정부의 가장 큰 과제가 되겠죠. 다만 지금 정부처럼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겠다는건 현실적 대안이 아닐뿐더러 일자리 시장 변화에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4차 산업혁명은 ‘긱이코노미(독립형 일자리 경제)’를 통해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바꿔가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4차산업이 본격화되면 첨단산업의 경우 ‘자발적 비정규직’이 보편적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비정규직 자체를 부정할 게 아니라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 못지않게 조정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본질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게 합리적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세대는 컴퓨터가 못하는 일을 오히려 인간이 더 잘한다는 ‘모라벡의 역설’에 착안해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정부는 과감한 교육개혁을 통해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세대의 준비를 도와야 하겠죠.”
- 미래산업 육성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뭔가요.
“미래로 가는 길은 결국 기술발전과 기업 활동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길은 국민 모두가 크고 작은 모험과 도전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을 때 탄탄대로가 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가 그걸 가능하게 하죠. 이 당연한 사실을 잊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후발주자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그동안 질주해 왔습니다.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까지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길은 경쟁과 협력,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 믿어요. 진리는 평범한 원칙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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