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심기 기자 ] 새해 벽두에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청와대에서 보냈다. 이달 말 열리는 대통령 주재 혁신토론회에 참석하겠냐는 내용이다. 참석 숫자에 제한은 없다. 보안 검색에 맞춰 두 시간이나 일찍 갈 필요도 없다. 주제는 지난 번과 같다. 자율주행차의 운행 허가다. 당시 세 시간 동안 갑론을박했으나 결론을 못 내렸다. 이번에는 매듭을 짓겠다고 청와대는 예고했다.
그때는 한 참석자의 질의가 논쟁을 촉발시켰다. 곧 출시될 완전 자율주행차 구매를 금지한 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어릴 적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비상 상황 시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율주행차를 구매하는 건 물론 혼자 탑승할 수도 없다. 그는 이 같은 규제가 헌법이 보장한 자유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만 머무는 담론
반대론자는 100% 안전한 자율주행차는 없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사고나 해킹, 시스템 에러 등 다양한 요인으로 자율주행차가 통제 불능에 빠질 수 있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 차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토론이 열기를 뿜으면서 법무부 장관까지 가세해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판단이나 제어가 전혀 필요 없는 100% 안전한 자율주행차가 가능한지를 놓고 기술적 논쟁까지 벌어졌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한 전문가의 제안이 올라온다. 전국의 중소도시 3곳을 정해 6개월간 지원자 100명을 받아 완전자율주행차 테스트를 한 뒤 결론을 내자는 아이디어다. 원격의료 도입을 결정할 때도 이런 방식으로 결론이 나왔다. 첨단 의료 전문가와 데이터 전문가들이 원격의료의 효용과 부작용을 놓고 격렬하게 논의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자 한 참석자가 전국 10곳을 정해 1년간 원격진료 희망 환자와 전문의사의 신청을 받아 시범 서비스한 뒤 결론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물론 지금까지의 글은 모두 가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규제혁신 토론회가 불가능하지 않다. 없는 일도 아니다. 미국과 싱가포르를 포함해 다양한 국가의 정부 기관들이 웹캐스팅으로 정책설명회를 한다. 국가 투자설명회(IR)도 이렇게 할 수 있다.
규제혁신의 방식부터 깨자
참석자에 제한은 없다. 전문가와 일반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발표와 현장토론에 대한 참가자들의 댓글은 곧바로 모니터에 뜬다. 즉석 온라인 조사도 한다. 한국의 기술과 정보통신망을 감안하면 일도 아니다.
올해는 대통령 행사부터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떨까. 지난해 1월에 열린 첫 규제혁신 토론회는 규제샌드박스를 상징하는 모래시계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1년 전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는 과감한 방식, 혁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점점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다. “우리가 뛰고는 있지만 선진국은 날고 있는 형국”이라는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유독 위험회피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역동성이 떨어지고 ‘창업가 정신’이 퇴조하고 있다. 기술은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사회의 담론은 과거에 머물고 있다.
문 대통령은 1년 전 “속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규제혁신은 구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결국 말잔치에 그쳤다. 올해는 말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 미래를 위해서는 편안한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기해년 새해 첫날이다.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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