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서 죽어도 죽지 않는 NPC로 열연
"일희일비 하지 않고 초연한 배우 될 것"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주인공은 현빈이다. 그러나 OST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듣고 떠올려지는 이는 배우 박훈일 것이다. 일명 '차좀비',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박훈이 연기한 차형석은 이렇게 불렸다. 극에서 분명 죽었지만 죽지 않는, 매회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전작 투깝스'가 끝나고 한동안 휴식기를 가졌어요. 안길호 감독과 미팅을 하는데, '송재정 작가와 함께 보자'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됐다' 싶었습니다. 저는 쉴 때 외형적으로 아무것도 손대지 않거든요. 마치 대역죄인 같은 비주얼이었죠. 이런 모습인데 왜?라는 생각이 들었죠. 안 감독께 나중에 물어보니 직관적이고 전형성에 갇히지 않을 것 같아 캐스팅 하게 됐다고 하셨어요. 남다르신 분입니다."
그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대해 '일생일대의 기회'였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처음엔 큰 생각 없이 출연을 결정 했어요. 2-3부 쯤에 '죽는다'고 들어서 특별 출연인 줄 알았죠. 그런데 살아나더라고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되게 부담됐을 것 같습니다. 대본을 보고 알았죠. '내가 이런 역할을 하다니. 웬 떡이야' 하고요."
극 초반 롤플레잉 게임에서 유진우(현빈)의 칼에 맞아 죽은 차형석은 후반부 내내 NPC(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되어 후반 내내 등장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 선율과 함께 말이다. 대사 한 마디 없었지만 그의 연기는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청자들이 제 대사, 분량 걱정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아직 정의는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제가 말 하는 모습이 궁금하셨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대사 없는 것이 익숙한 편입니다. 연극 작업을 오래 해서 대사를 함축하는데 익숙합니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되거든요. 배우가 말하지 않으면 관객의 상상은 범위가 크게 늘어나죠. 차형석이라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작품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넓게 열어줄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되어 좋았습니다."
박훈에게 차형석이란 캐릭터는 아픈 손가락이다. '악역'이라는 오명을 쓴. "저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좋아해요. 그게 사람이죠. 세상에 무조건적으로 착하거나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형석은 굉장히 사람다워요. 표현 방식이 세련되지 않고 더디고 날카롭고 둔탁하죠. 겁이 많은 사람이라 더 안타까워요. 처음 대본을 짜깁기 해 연기하는데, 난해했죠. 극이 흘러갈수록 굉장히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겁 많은 강아지가 더 크게 짖는 것처럼 말이죠."
그는 촬영하면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 중 하나로 김의성을 꼽았다. "묻어가는 장면이 많았어요. 처음 아버지 차병준과 NPC인 차형석이 마주하고, 칼로 내리치는 장면은 특히요. 아들을 내쳤던 아버지에게서 툭 하고 두려움과 미안함이 나오니까 감정 연기하는데 도움을 받았죠. '이래서 김의성, 김의성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의성 선배님이 나오면 모두 '악당이다'라고 하는데, 제겐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있으신 분이세요."
작품에서 가장 많이 마주한 배우는 현빈이다. 박훈은 그에 대해 "상대성이 좋은 배우"라며 칭찬했다. "결과물에서 보이지 않나요? 현빈은 워낙 케미를 잘 만드는 스타일의 배우입니다. 배려도 많이 받았고요. 액션신 할 때 동생이지만 배워야겠다 싶었어요. 정말 잘 합니다. 태생적인 비율이 다르고요. 남다르게 특별한 외모를 가진 친구죠. 저도 나중에 그렇게 해야 할 텐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웃음)"
그는 자신을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라고 소개했다. "현빈과 주로 연기를 하게 됐기에 다른 배우들과도 교류하려고 노력했어요. 제 나이가 딱 중간대라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박신혜가 SNS에 함께 촬영한 사진을 올려준 덕에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랐었죠. 좋은 친구들입니다."
세주 역을 맡은 엑소 찬열에 대해서도 "기특한 친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처음 만났는데 순수하고 바른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카톡 채팅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죠. 찬열은 이 작품에서 처음 봤는데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지도 몰랐죠. 연기에 대한 애정도 높고요. 세주가 초반에 저를 '나쁜사람'이라고 하며 연기를 해서 극후반까지 제 캐릭터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진 거 같아요. 결과적으로 찬열이 연기를 잘 했습니다. 덕분에 엑소 콘서트도 갔다왔어요."
박훈은 게임 까막눈이라고 귀띔했다. '알함브라' 속 NPC 역할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수를 받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 이후 게임은 안 했어요. 던전이 뭔지도 몰라서 게임 좋아하는 친구들의 도움도 받았어요. 저는 겨우 이해했는데, 부모님이 이해를 못하시더라고요. 제가 나온다고 보시는데, 계속 재방송인 줄 아세요. 하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신선한 소재로 각광을 받았지만 세주(찬열)의 실종 과정, 차형석의 사망 과정을 반복해 보여주며 '지난친 재탕'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게임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반복적으로 천천히 설명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감독, 작가님이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연기할 때도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였죠."
박훈은 송재정 작가에 대해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제가 나이가 들었나 생각될 정도로 상상력이 젊으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또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열었다는 점이죠. '이런 것까지 구현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새로운 것을 선보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죠.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은 창작자로서 의무인 것 같습니다."
결말에 대해 박훈은 "진우가 버그를 해결하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 아닐까 한다. 시즌2가 나올 수도 있다는 열린 결말 같다"고 평가했다.
오랜시간 연극,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늦깎이 데뷔를 했다. 1981년생인 그는 37살 경 김은숙 작가의 히트작 KBS2 '태양의 후예'(2016)를 통해 처음으로 매체 연기를 시작했다. 군인 최우근 역으로 대중의 눈도장을 받은 그는 KBS2 '드라마 스페셜-빨간 선생님', '맨몸의 소방관', MBC '투깝스'로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연극 활동 시절은 솔직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연기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한 것 같거든요. 매우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배우를 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운이 좋은 편이죠. '태양의 후예'땐 솔직히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시청률도 체감하지 못했죠. 4~5년이 지나니 제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알게됐어요. 모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조금식 성장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일희일비하지 말고 초연하게 연기자하는 마음가짐이죠."
'알함브라'는 끝났지만 우리는 박훈을 SBS 드라마 '해치'로 만날 수 있다. 정통 사극부터 현대극 등 장르를 불문, 탁월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줬던 박훈은 이번 작품에서도 달문과 쏙 빼 닮은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인다.
극중 박훈은 왈패조직의 우두머리인 달문으로 분해 부채 하나로 십 수명의 장정을 상대하는 무술의 달인, 협객으로 여심을 저격할 전망이다.
"선배님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아요. 가장 비싼 가발을 쓰는 캐릭터기도 하고요. '무술달인'으로 나오는데 제 비주얼 때문에 이렇게 캐스팅 되는 것 같아요. 이 얼굴에 싸움을 못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죠. 하지만 전 평화주의자 입니다.(웃음) 지금은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기보다 주어진 것을 잘 해내야 하는 단계입니다. 시청자들에게 더욱 신뢰를 드리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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