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핵심상권 곳곳이 '유령 건물'
정부 정책發 2차 쇼크…자영업자 생사 갈림길에 서다
작년 최저임금 오르고 주52시간 시행…올핸 주휴수당까지 부담
명동 곰국시집 "더 버티기 힘들다"…강남대로 11월부터 공실 급증
광화문·종각 대로변, 임대료·권리금 확 낮춰도 문의조차 없어
[ 최진석/민경진/구민기/이주현 기자 ]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4번 출구 바로 앞 4층짜리 건물. 대로변에 역세권인 알짜 입지에 있지만 임차인을 구하지 못해 통째로 비어 있다. 인근 A공인중개사는 “입점해 있던 병원이 나간 뒤 3년째 공실인 상황”이라며 “월 임대료를 8000만원에서 6000만원까지 내렸지만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중개사는 “공실이 발생한 뒤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점포 개발 문의도 있었다”며 “올 들어선 이런 문의조차 자취를 감췄다”고 말했다.
종로와 명동, 강남대로와 신사동 등 서울의 중심 상권에서조차 자영업자들이 떠난 자리를 새 창업자가 채우지 못하면서 공실이 장기화하고 있다. B공인 대표는 “종각 대로변에 상가 10곳이 비어 있는데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5년까지 공실인 상황”이라며 “권리금이 반토막 나도, 소유주들이 매매가 하락을 감수하면서 임대료를 낮춰도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장사 접는 자영업자
경기 침체에다 최저임금 급등,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임대료 부담 등 4중고로 자영업자 폐업이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자영업자는 549만5000명으로 전년 동월(559만 명)보다 9만5000명(1.7%) 감소했다.
명동에서 43년째 곰국시집을 운영하는 C사장은 “체감상으로 외환위기 때보다 경기가 심각한 것 같다”며 “한·일관계 악화, 사드배치 문제 등 외교관계가 나빠진 이후 명동 관광객이 줄어든 데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후 저녁 회식이 뚝 끊겼다”고 설명했다. C사장은 요즘 곰국시집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43년의 세월이 아쉽지만 이 상태면 버틸 수가 없다”며 “장사를 접고 은퇴하는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종로에서 8년째 보쌈집을 운영하는 D대표는 “지난해 매출이 재작년보다 30% 감소했다”며 “올해 초부터 최저임금이 더 올라 어쩔 수 없이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원 수를 줄였다. 다섯 명을 쓰던 피크타임에도 지금은 세 명만 두고 있다”고 말했다.
명동의 E공인중개사 대표는 “주변 사장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10곳 중 7~8곳은 적자”라며 “가게를 내놓고 싶어도 권리금을 포기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장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귀띔했다. 이상혁 상가정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식당 등 외식업이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받은 충격은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이상”이라며 “인건비는 오르고 소비심리까지 위축된 상황에서 올해 최저임금이 10.9% 추가 오르는 2차 쇼크가 덮치면서 여러 핵심 상권이 무너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늘어나는 공실
폐업은 공실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공실 증가 현상은 주요 광역상권뿐만 아니라 신흥 골목상권, 직장인 수요가 두터운 오피스상권 등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이다.
서울 강남의 중심 상권 중 하나인 강남대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신논현역~논현역까지 길이 750m의 대로변 상가건물 69곳 중에서 1층 공실이 발생한 곳은 12곳이었다. 2층 이상으로 확대하면 29곳에서 공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이모씨는 “손님이 줄자 임대료를 낼 수 없어 작년 여름 아르바이트 1명마저 줄이고 혼자 운영하고 있다”며 “강남대로에 공실이 늘어난 건 작년 11월부터다. 안 보이던 공실이 늘어나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는 2층짜리 상가는 1년째 공실이다. F부동산 대표는 “공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입지 조건이 좋은데 아무도 들어와서 장사하려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같은 골목에 있던 와바(WABAR)도 5개월 전 문을 닫았고 현재 비어 있다. F부동산 대표는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상가 매물이 두 배가 됐다”며 “장사를 접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문의하는 사람이 줄어드니 거래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작년 1분기 7.9%였던 논현역 일대 공실률은 같은해 3분기 18.5%로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동대문도 같은 기간 10.9%에서 14.6%로 상승했고, 종로도 2.5배 급증한 5.3%에 달했다. 경매로 넘어간 상가들의 몸값도 추락했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상업시설 총낙찰가는 2087억2248만원으로 전년(3279억6291만원) 대비 36.4% 감소했다. 총감정가도 43.5% 급감했다. 지지옥션 관계자는 “상가 선호도가 낮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라고 설명했다.
권리금·임대료 급락
기존 임차인들이 장사를 포기하는 매물이 늘면서 권리금과 임대료가 급락하고 있다. 핵심 상권인 명동에서 권리금을 포기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G부동산 관계자는 “명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30년 했는데 중심 거리(명동8길, 명동예술극장~명동역)에 공실이 많이 나는 건 처음 본다”며 “권리금과 임대료도 엄청나게 조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임대료는 20%가량 내려갔다고 보면 된다”며 “권리금은 중심 거리 기준으로 4억~10억원 정도인데 지금은 무권리로 나오는 곳들도 있다”고 전했다.
H공인중개사 관계자는 “1층 상가 임대료는 33㎡ 기준으로 월 250만~300만원대”라며 “장사가 안되니 임대료 내기 빠듯해진 임차인들이 권리금도 못 받고 나가는 사례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실장은 “한국은 생계형 자영업자가 많고, 준비되지 않은 창업으로 인한 폐업 비중이 높다”며 “자영업자들이 충분히 준비한 뒤 창업해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진석/민경진/구민기/이주현 기자 isk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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