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훈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국내 한 증권사 법인영업부 소속 A씨는 매주 평일 5일 동안 2~3차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있는 전주혁신도시를 찾습니다. 팀원 1명과 번갈아 평일 5일을 모두 커버합니다. 주로 KTX 용산~익산역 구간을 이용합니다.
전주역에서 기금운용본부까지의 거리는 약 8km로 익산역에서의 거리(22km)보다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익산행을 이용하는 이유는 전라선 전주행 기차 편보다 호남선 익산행 기차 편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익산역에선 주로 택시를 이용합니다. 버스로 20~30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한 시간에 두 대 뿐이라 이동이 쉽지 않습니다. 익산역에서 다른 증권사 직원들과 함께 단기 렌터카인 ‘쏘카’를 빌리기도 합니다.
A씨의 임무는 국민연금 주식투자 운용역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투자 상품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하우스 리포트 같은 고급 정보를 전달하고, 애널리스트와의 만남도 주선합니다. A씨와 같은 직종을 ‘법인영업직’이라고도 합니다. 투자설명회(NDR· Non-Deal Roadshow)가 마련되면 팀원이 전주로 총출동합니다.
그런데 운용역들이 만나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종종 출입구를 오가는 운용역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들이 하염없이 취재원을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 ‘뻗치기’와 비슷합니다. 점심은 경쟁 증권사 직원들과 주로 먹습니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로 운용역과 밥 한 끼를 먹는 게 쉽지 않아졌습니다.
50여개의 국내외 증권사들에게 65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가장 중요한 고객입니다. 규모가 작은 증권사는 주식 위탁 매매 수수료 수익의 수십%를 국민연금에 의존합니다.
국민연금은 매년 두 차례 거래 증권사를 선정합니다. 평가를 통해 특정회사와의 거래액을 조정하는데, 이는 회사 수익으로 직결됩니다. 물론 돈을 얼마나 잘 벌어다줬는지 ‘정량평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운용역들이 메기는 ‘정성평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증권사 직원들은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라도 매일 전주행 KTX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습니다.
증권사 직원들은 2017년 초 기금운용본부가 이전하기 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회사 본사와 논현동 기금운용본부를 오갔습니다. 기금운용본부가 전주로 이동하고 나선 몸과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전주를 방문한 날은 다른 일은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회사 영업직을 만나줄 수 없는 국민연금 운용역들이 상황도 이해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한 ‘헛물 킨 날’이면 더 힘이 빠집니다. A씨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드는 날도 적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안효준 기금운용본부장(CIO·최고투자책임자)의 지시로 지난 7일부터 ‘브로커데이’를 만들었습니다. 매일 십 수 명의 증권사 직원들이 로비에서 서성거리는 상황이 소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서울 강남에 있던 기금운용본부는 브로커데이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유야무야됐습니다. 2017년 초 전주로 이전하고나선 3년째가 돼서야 브로커데이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 ‘그동안 갑질을 너무 했다. 늦은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옵니다.
운영 방식은 간단합니다. 50여 곳의 증권사를 가나다순으로 총 4개 그룹으로 나눠 2주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방문토록 했습니다. 이날은 각 사별로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이용해 운용역과 미팅을 잡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전주에 올 게 아니라 2주에 한 번씩만 전주에 와달라는 취지입니다. 1층 로비에 서성이던 이들을 위해 2층 회의실을 개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진 증권사 직원들의 ‘매일 방문’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A씨의 전언입니다. 국민연금이 아무리 촘촘한 평가 체계를 갖추고 있더라도, 50여개 회사가 경쟁하는 가운데 운용역과의 스킨십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점수 잘 받은 B사는 과거 몇 달 동안을 매일 내려오더라. 점수를 잘 받은 해외 C사는 전문 애널리스트를 몇 차례 불렀는데, 평가가 높더라.’ 이런 풍문도 전주행 발길을 끊지 못하는 요인입니다. 모처럼 국민연금이 브로커데이를 만들었지만 증권사 영업직원들이 전주를 경쟁하다시피 찾는 상황은 당분간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끝) /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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