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가상화폐 공개(ICO)에 대해 ‘전면 금지’ 방침 유지를 결정했다. 1년 넘게 뜸을 들인 뒤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리는 한편 여전히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아 ‘회색지대’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해야 하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 정부의 ICO 전면금지, 이유는 있다
그동안 암호화폐 정책을 조율해온 국무조정실은 ICO가 △여전히 투자 위험성이 매우 높고 △해외에서 ICO를 하지만 사실상 국내 투자자 위주로 자금을 모금하며 △무인가 영업행위 및 사기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이유로 ICO 금지를 풀지 않았다.
사기에 가까운 비즈니스 모델을 내세우며 새로운 코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년층 대상 다단계 코인 업체들, 법률 검토를 하지 않고 서비스를 내놔 현행법을 위반하는 경우, 과장·허위 광고로 인한 사기행각 등이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는 ICO 진행시 투자정보나 개발진 현황 및 허위정보 기재 우려가 있다는 점, ICO 프로젝트 가운데 실제 서비스를 실시한 회사가 여전히 없다는 점도 문제로 봤다. 정부가 업계를 ‘속 빈 강정’으로 바라보는 게 현실이다.
◆ '초기 기술' 업계 항변도 일리 있다
업계도 항변의 여지가 있다. 지금의 난맥상은 정부가 기초적 가이드라인마저 내놓지 않은 탓이 크다는 것. ICO전면 금지 정책은 우리나라에 암호화폐 열풍이 불기 전인 2017년 9월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수많은 사기사건들과 투기 과열 사태 등이 해당 정책이 지속되는 와중에 터졌기 때문이다.
사기성 업체들의 음지화만 양산하면서 정상적인 업체들만 죽이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뒤를 이었다. 관계자들은 “디지털 자산(암호화폐)에 대한 법적 정의조차 모호해 비즈니스의 위법성 여부도 당국 해석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꼬집었다.
제대로 된 실사용 서비스가 없다는 정부 지적에 대해서도 “신기술의 실사용 사례가 하루아침에 ‘뚝딱’ 하고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 사례를 예시로 들며 정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닷컴 버블이 절정에 달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은 여러모로 투자금이 몰리던 ICO 열풍과 닮았다. 일례로 당시 ‘새롬기술’이라는 정보기술(IT) 회사는 당기순이익 수억원 수준에 불과한 중소기업이었지만 닷컴버블 투기에 힘입어 무려 시가총액 5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결국 닷컴 버블은 붕괴했다. IT기업가들은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그중엔 손정의 회장도 있었다. 닷컴 버블 당시 시총 200조원을 훌쩍 넘긴 소프트뱅크는 버블이 꺼지자 약 3조원으로 쪼그라들며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 최고 기업은 대부분 IT 기업들이다. 개발자들의 노력과 자본 투입, 시행착오 과정을 거친 결과다. 업계 관계자들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도 이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산업발전 관점에서 합의점 모색 필요"
정부는 ICO 제도화에 선을 그었다. 가이드라인을 내놓는 행위 자체로 정부가 ICO를 ‘공인’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취지다. 신중론을 취한 것이지만 뒤집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입장을 정부가 고수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업계가 줄곧 “사실상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은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으나 정부는 “암호화폐와 별개로 블록체인 기술과 관련 산업 발전은 적극 노력하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암호화폐에 대한 명확한 규제나 가이드라인을 내달라고 요구해왔으나 정부는 여전히 “암호화폐는 문제가 있으나 가이드라인은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만 재확인했다.
결국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업체들은 ‘회색지대’에 갇혀 고사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외국에 나가 사업을 하려고 해도 국내 법의 특성인 ‘속인주의(해외에서도 내국 법을 적용받는 것)’ 원칙 때문에 불가능한 형편이다.
정부는 미국·중국·일본 등과 보조를 맞추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한국은 앞서나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가 해외 국가들과 발맞춰서 나가면 시장 규모가 큰 미국·중국·일본으로 가지, 한국으로 왜 오겠느냐”라고 지적한 바 있다.
때문에 업계도 시장 정화와 자율규제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정부 또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제대로 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송희경 국회 4차산업혁명포럼 공동대표(자유한국당)는 최근 “산업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을 수 있게끔 인프라를 닦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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