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KDI 설립 산파 역할…대규모 부실기업 정리 결단
세평에 연연하지 않았던 외유내강이 어울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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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7세였던 김 전 부총리는 바로 그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국책 경제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그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설립자금을 록펠러나 포드재단에서 출연받기 위해 뛰어다니는 등 KDI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지만, 자신이 초대 원장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게 본인의 후일담이다. 원로 경제학자들을 제치고 서강대 부교수였던 그를 발탁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안이었다. “당신을 부원장으로 추천했는데 대통령이 원장으로 낙점했다”는 김학열 당시 부총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학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등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된 주요 국책사업에 대해 이른바 균형성장론을 내세운 반대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런 여건이 그를 초대 원장으로 발탁하게 된 배경일 것이라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구본호 전 울산대 총장,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박영철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송병락·홍원탁 서울대 교수 등 그가 스카우트한 해외 박사들로 채워진 KDI는 정말 대단했었다. 거시경제 현안은 물론이고 교육 노동 환경 등 사회개발 문제들도 모두 다뤄 경제기획원이 아니라 범정부적 종합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른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삼성 현대 대우 LG 등 대기업 그룹이 앞다퉈 종합 경제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KDI의 성공에 자극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재무부 상공부 건설부 등 다른 경제부처의 산하 연구기관 설립은 KDI라는 싱크탱크를 가진 경제기획원에 맞서 자기들 영역을 지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경제정책의 고도화로 이어진 것 또한 분명하다. KDI 효과, 바로 김만제 효과가 1970~1980년대 고도성장에 큰 몫을 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가능하다.
KDI 원장 시절 처음 만난 그는 항상 웃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겪어볼수록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마도 외유내강이란 표현이 그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장관 시절 그의 인사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가 한 것이 맞는지 놀랍기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평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의 장점이자 단점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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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일 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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