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영결식…사그라지지 않는 그녀의 외침

입력 2019-02-01 16:55   수정 2019-02-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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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라!”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남았다. 끝내 일본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고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외침은 영상으로, 시민의 목소리로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뚜렷이 울려퍼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과도 같은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1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 김 할머니가 수요일마다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며 집회에 참석했던 곳이다.

시민장으로 진행된 이날 영결식은 600여명의 추모객이 함께했다. 교복 입은 중학생부터 지팡이를 집은 노인까지, 수녀 스님 장애인 등 각계 각층의 시민들은 저마다 노란 나비 모양의 종이 깃발을 흔들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권미경 연세대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김 할머니는 일본이 사죄하는 날 활짝 웃으시겠다며 잘 웃지도 않으셨다”며 “이제 그곳에서 너무도 원했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도 꼭 낳으시고 마음껏 웃으세요”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날 영결식에 앞서 김 할머니는 오전 6시 30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떠났다. 강추위가 다시 돌아온 이른 아침이었지만 김 할머니의 발인을 찾은 유가족과 조문객, 취재진 등 100여명은 일찍부터 빈소를 찾았다.

수요집회를 주최하며 임종까지 김 할머니를 챙겼던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고인의 운구함이 운구차에 실리기 직전 운구함 위에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라는 글을 남겼다.


빈소를 떠난 김 할머니는 서울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으로 향했다. 평화의 우리집은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마련한 안식처다. 부산 출신인 김 할머니는 생전 8년가량 이곳에서 머물렀다. 문이 열리고 김 할머니의 영정이 들어가자 이곳에 있던 길원옥 할머니는 “왜 이렇게 빨리 가셨어. 이렇게 빨리 안 갔어도 좋은데. 나도 따라갈게요”라고 말했다.

안식처를 떠난 고인은 오전 8시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제(路祭)가 시작됐다. 운구차 뒤로는 94개의 만장(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써놓은 커다란 깃발)이 도열했고, 나비깃발과 피켓을 손에 든 600여명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만장엔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영웅 김복동” 등의 글귀가 담겼다.

운구행렬은 광화문광장을 지나 사직로를 따라 일본대사관 앞까지 행진했다. 행진 내내 거리에서, 영결식 장소에서 김 할머니의 외침은 영상을 통해 또렷이 퍼졌다.
“억울하고 분통해서 죽지를 못하겠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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