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신의칙 혼란' 교통정리 안한 大法…또 추상적 기준 내놓아

입력 2019-02-14 17:41  

대법원 '통상임금 신의칙' 판결

1·2심 판결 뒤집은 이유는

"추가 법정수당, 매출액 2~4%에 불과하고
5년 연속 영업이익 흑자·매출 지속적 증가
충분히 지급 가능…경영 어려움 초래하지 않아"



[ 신연수 기자 ] 대법원이 통상임금 관련 사건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의 위반 여부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놨다. 각급 법원에서 진행 중인 통상임금 소송에서 사측이 크게 불리해질 전망이다. 법조계에선 그러나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이 ‘반쪽짜리’에 불과해 통상임금 사건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영 위험 근로자에게 전가하면 안 돼”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14일 인천 시영운수 소속 버스기사 박모씨 등 22명이 회사를 상대로 “2010년 4월~2013년 3월 상여금 등을 포함해 재산정한 통상임금의 차액을 지급하라”며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근로자 측 손을 들어줬다.

사건의 핵심 쟁점은 근로자 측의 추가 수당 요구가 신의칙에 위배되는지 여부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12월 갑을오토텍 사건에서 통상임금의 조건으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근로자가 소급 청구하는 수당이나 퇴직금 액수가 지나치게 커 회사에 경영난을 초래할 정도라면 신의칙에 위배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예외를 뒀다. 이후 6년간 통상임금 사건이 법원에 쏟아졌지만 재판부 재량에 따라 판단이 엇갈렸다.

시영운수 사건에선 1·2심 모두 근로자 측 요구가 경영난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신의칙을 어긴 것이라고 봤다. 하급심 재판부는 “2011년 기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산입하면 시간당 통상임금이 약 29.1% 오르는데, 이는 노사가 합의한 임금 인상률인 3.5%의 8배를 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또 “피고가 추가로 부담하게 될 법정수당 액수(총 7억6000여만원)는 3년간 당기순이익의 623%에 해당한다”며 “예측하지 못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돼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근로자의 요구가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신의칙을 근로관계 강행규정보다 우선해 적용할지 판단할 때는 근로자의 기본 생활을 보장·향상시키고자 하는 근로기준법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경영난 초래를 이유로 거부한다면 기업 경영에 따른 위험을 사실상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계류 중인 통상임금 소송 100건 넘어

이를 토대로 대법원은 시영운수의 연간 매출과 인건비, 이익잉여금 등 사정을 고려했을 때 추가 수당을 지급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권리가 소멸된 부분을 제하면 직원들이 요구하는 추가 수당은 4억원 상당으로 추산된다”며 “이는 회사 연매출의 2~4%, 2013년 총인건비의 5~10%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회사의 이익잉여금도 3억원이 넘어 추가 수당 중 상당 부분을 갚을 수 있다고 봤다. 회사가 꾸준히 당기순이익을 내고 있고 ‘버스 준공영제’로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법원의 판단은 유사 소송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각급 법원에서 진행 중인 통상임금 소송은 100여 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형 로펌의 노동 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이 사실상 하급심 재판부에 사측의 ‘경영난 주장’을 신중히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상임금 소송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줄 것이란 당초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아쉬운 판결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2015년 10월 대법원이 이번 사건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던 것을 두고 법조계에선 신의칙 적용 기준이 구체적으로 마련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은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다소 모호한 기준만 제시했을 뿐이다. 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여전히 개별 재판부가 사안별로 재량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바뀐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신의성실의 원칙

계약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이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할 때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고려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추상적 원칙. 민법 제2조 1항(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에 근거한다. 대법원은 2013년 근로자의 통상임금 소급 적용 청구로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위기가 발생하면 이 원칙에 위배돼 허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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