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없는 골목상권 살리기

입력 2019-02-16 09:24  



(윤정현 문화부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자영업·소상공인과의 대화’를 가졌습니다. 간담회에는 소상공인연합회, 시장상인연합회 관계자 등 16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만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연 것은 처음이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자신을 ‘골목상인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 대통령은 2022년까지 18조원 규모의 전용 상품권 발행하겠다 했습니다. 전국 구도심 상권 30곳 환경을 개선하는 ‘골목상권 르네상스 프로젝트’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최저임금, 카드수수료 등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날 간담회를 지켜보면서 ‘골목이 사라지고 있는데 골목상권이 유지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읽은 《골목 도쿄》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방송국 PD인 저자는 수백번 일본을 오가면서 알게된 골목의 참맛을 책을 통해 전합니다. 저자는 “골목이 골목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건강한 도시생태의 지표”라고 강조합니다. 도쿄의 화려한 건물과 넓은 도로 뒷편엔 여전히 서민들의 일상이 녹아있는 골목길이 살아있습니다. ‘고층 복합건물과 미래적 디자인이 빛나는 곳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공간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신주쿠, 시부야, 니혼바시의 뒷골목 선술집을 누비다 떠올린 곳은 한국의 종로 피맛골입니다. 조선시대에 조성돼 해방을 거치고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피맛골엔 복잡한 골목마다 서민들의 먹거리가 가득했죠. 지금은 르미에르빌딩, D타워라는 고층 복합빌딩으로 스며버렸습니다. 간판은 있지만 길은 사라졌고 당시의 풍취는 증발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세련되고 깔끔한 근미래 건물을 얻은 대신 서울의 역사와 수많은 청춘의 추억을 너무 태연하게 잃어버렸다’고 표현합니다.

골목상권의 자생력과 관련해서도 쓴소리를 합니다. 대형 프렌차이즈가 골목상권을 황폐화시킨 주범이라는 주장에 대해서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전국 체인의 입점으로 골목식당과 가게가 어려워진다면, 분명 프랜차이즈가 제공하는 수준의 품질을 제공하지 못했거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골목식당은 골목식당 나름대로의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프랜차이즈가 어디서나 비슷한 수준의 맛을 적당한 가격에 제공한다면 골목식당은 맛있고 개성 넘치는 요리와 술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길게 보면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도 방법입니다. 일본에선 차고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도쿄 같은 도심도 동네의 이면 도로와 골목길에도 차를 마음대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빕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에 상권이 형성되고 상권이 좋은 골목은 걷기에도 좋다는 게 저자의 생각입니다.

다시 한국을 봅니다. 상품권을 찍어 내고 낡은 건물들을 번듯하게 새로 고치는 게 골목상권을 살리는 일일까요. 그렇게 심폐소생으로 생명을 유지한 상권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응답하라 1988’에 배경음악으로 나오면서 한번 더 인기를 끌었던 동물원의 ‘혜화동’엔 이런 가사가 있죠.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그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잊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골목과 함께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끝)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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