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 작년에만 74명 사표
"탈원전에 더이상 희망 없다"
3대 공기업 자발적 퇴직자 급증
[ 서민준 기자 ]
“지난달 아끼던 후배 한 명이 사표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있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했더니 희망고문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원전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최근 회사 내부 분위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탈(脫)원전 정책 초기만 해도 ‘어떻게든 버티면 달라지겠지’ 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희망을 버려야겠다는 직원이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바뀐 분위기는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24일 정유섭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국내 3대 원전 공기업으로 꼽히는 한국전력기술, 한국수력원자력, 한전KPS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세 기업의 원전 부문 자발적 퇴직자는 2015~2016년 170명에서 2017~2018년 264명으로 늘었다. 55.3% 급증한 것이다.
원자력발전소 운영을 담당하는 한수원에서만 작년 74명이 사표를 냈다. 보수·유지 업무를 하는 한전KPS에서는 49명, 설계 분야인 한전기술에서도 21명이 짐을 쌌다. 공공기관의 한 관계자는 “고용이 보장된 공기업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자발적 퇴직자가 늘어난 것은 정책 변화 등 특수 요인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5월 출범 직후 안전성을 이유로 원자력발전 비중을 점차 줄여 궁극적으로 ‘0’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원전업계는 “원전을 급격히 줄이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붕괴되니 속도를 늦춰달라”고 호소했지만 정부는 ‘정책 수정 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민간기업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원전 핵심 기자재인 원자료, 터빈발전기 등을 제조하는 두산중공업은 2017~2018년 원전 인력 80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올해부터는 과장급 이상 직원을 상대로 유급휴직도 시행하고 있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1년간 2개월씩 의무적으로 쉬어야 하는데 이미 상당수 직원이 휴직서를 내서 업무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 상황은 더 열악하다. 두산중공업의 90여 개 주요 협력업체는 탈원전 정책 이후 평균 40% 정도 직원을 구조조정한 것으로 조사됐다.
핵심 인력의 해외 유출도 잇따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17~2018년 10여 명의 두산중공업 원전 인력이 해외 원전업체로 이직했다. 프랑스 아레바, 미국 웨스팅하우스,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공사(ENEC) 등 대부분 한국의 경쟁사다. 한전기술, 한수원, 한전KPS에서도 2017~2018년 14명이 해외 원전기업에 둥지를 틀었다. 해외 기업은 공공기관이 의무적으로 재취업 현황을 파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어서 실제 해외 이직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그간 원전 인력 이탈과 이에 따른 산업 생태계 붕괴에 대해 “탈원전 속도가 느리고 원전 수출, 해체산업 육성 등 대안이 있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원전업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고 반박한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현 정부 들어 신규 원전 6기를 백지화했는데 이로 인해 원전 기자재·설계업체들은 올해 말이면 일감이 끊긴다”며 “원전 수출에 성공해도 일감은 4~5년 뒤에야 떨어져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올해는 원전 인력 이탈이 더 빨라져 산업 생태계 붕괴가 현실이 될 것”이라며 “백지화한 신규 원전 중 신한울 3·4호기만이라도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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