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목표와 달리 소외계층 더 힘들어져
민간 자율성·창의성 발휘할 기회마저 억압
정갑영 <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前 총장 >
한국은 사회적 동질성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한다. 모든 국민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유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구 5000만 명 넘는 나라가 한국처럼 동질적인 사회문화적 특성을 지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1960년대까지는 소득수준도 별 차이가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에서 빈부격차가 컸다 한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겠는가. 50대 후반 국민은 최빈국 수준에서 모두가 궁핍했던 경험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한국에서는 평등을 중시하고, 어떤 이유로든 ‘나보다 앞서가는 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정서가 팽배해 있다. 분배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득불균형 수준이 국제적 기준으로 심각하지 않다고 발표해도 국민이 받아들이는 정서는 그렇지 않다. 불균등을 용인할 수 있는 사회적 잣대가 엄격하기 때문에 조금만 분배가 악화돼도 불만이 쌓이고 분기탱천(憤氣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형평 제고를 위한 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결합돼 경제 논리와는 상반된 정책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최근 분배지수가 악화됨에 따라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평등은 모든 인간의 천부적 인권임은 물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므로 어느 사회에서나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임에 틀림없다. 효율을 강조하는 시장경제에서도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결국은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 교훈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시대를 막론하고 소외계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경제적 후생을 제고해 불균등을 개선하는 정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이 자칫 획일적 평등주의에 빠지면 당초 목표와 정반대로 오히려 소외계층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모든 지역과 산업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제 등이 바로 이런 위험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업종에 획일적인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겠는가. 최저임금을 받기도 힘든 계층부터 일자리를 잃고, 평균 임금이 낮은 업종과 지역에서부터 실업이 확산된다.
최근 자영업과 영세기업 등의 고용참사가 이 같은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선진국은 물론 인도와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산업과 지역, 연령 등 여러 특성에 따라 다양한 기준으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정부는 위화감과 지역적 형평성 때문에 최저임금의 차별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향후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마다 당초 목적과 달리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와 업종이 지속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교육 평준화도 똑같은 운명의 길을 가고 있다. 지나친 과외비 지출을 줄여 저소득층에도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도입됐지만 결국 공교육은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 저소득층은 피폐화된 공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반면 상류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카이캐슬’에 안주하고 있다. 소외계층의 명문대학 접근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개천에서 용’을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획일적인 평등주의에 밀려 가난의 대물림을 해소하고 양극화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형평을 제고한다는 명분으로 획일적인 규제수단을 동원하면 오히려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마저 억압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인정받지 못하며 남보다 튀는 혁신이 눈총받고 효율성이 저하돼 결국은 모두가 하향 평준화로 가기 쉽다. 최저임금과 기업 지배구조, 대학과 유치원 등에서도 지나친 획일적 잣대를 들이대면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개인과 기업의 자율을 확대해 혁신과 창의를 촉진하는 것도 사회적 형평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다. 각 경제주체의 고유한 이질적 특성을 무시하고 모두를 크기가 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잠재우는 신화 속 비극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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