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도시 모음집도 내놔
[ 은정진 기자 ]

시집에선 시종일관 사과꽃이 등장한다. 사과꽃은 여느 꽃들처럼 3월에 꽃봉오리를 틔우며 봄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지만 시 속 사과꽃엔 지난 우리 역사속 이름 모를 희생자들에 대한 숙연함이 묻어난다. ‘사과꽃 당신이 올 때’에선 ‘나는 누군가의/울음이고/노래며/사과꽃이었다//당신이 당신만이 아니듯/나는 사라진 이들이/간절히 보고 싶어 핀 꽃이었다’고 말한다. 사라진 이들이 사과꽃으로 피어난다고 표현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희생을 통해 진정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지닌 위대함을 강조했다.
시인은 그 위대함의 극치가 3·1절이 아닐까 되묻는다. 시집은 독립자금을 나르다 고문을 받고 돌아가신 시인의 외할아버지를 통해 본 무명의 삶과 죽음에서 시작됐다. 2부 사과꽃 진혼제에서 저자는 자신이 바라본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무거운 고뇌를 ‘백년전 목소리’ ‘오늘도 아픈 어제’ ‘잃어버린 나라의 사람들에게’ 등으로 담아냈다.
그는 서문에서 “꽃이 뜨겁고 매혹적인 건 죽음을 품어서”라며 “꽃처럼 허망하게 사라진 이름 모를 이들의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집은 역사에 대한 성찰은 물론 현실 속 혼란과 고통, 꿈과 절망, 경제적 궁핍, 삭막해지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고민도 녹여냈다. 특히 체육계 미투 운동 시발점이 된 심석희·신유용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쓴 시 ‘소금 눈보라’가 눈에 띈다. ‘소녀들을 미친 듯이 파먹은 나쁜 사내가 있지/식민지를 파먹던 일본 놈들과 다를 바가 없지’처럼 거칠지만 통렬하게 현실을 꼬집는 등 시대가 요구하는 모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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