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꽃으로 피어난 이름 모를 희생자

입력 2019-03-11 17:19  

신현림 시집 '사과꽃…' 출간
세계 기도시 모음집도 내놔



[ 은정진 기자 ] 제도권 내 여성 담론을 뒤흔든 1990년대 대표 전위 시인으로 꼽히는 신현림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사과꽃 당신이 올 때》(사과꽃)를 냈다. 그는 문단과 평단에선 큰 지지를 받는 시인이지만 대중에겐 TV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 공유가 들고 나온 산문집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를 통해 크게 알려졌다.

시집에선 시종일관 사과꽃이 등장한다. 사과꽃은 여느 꽃들처럼 3월에 꽃봉오리를 틔우며 봄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지만 시 속 사과꽃엔 지난 우리 역사속 이름 모를 희생자들에 대한 숙연함이 묻어난다. ‘사과꽃 당신이 올 때’에선 ‘나는 누군가의/울음이고/노래며/사과꽃이었다//당신이 당신만이 아니듯/나는 사라진 이들이/간절히 보고 싶어 핀 꽃이었다’고 말한다. 사라진 이들이 사과꽃으로 피어난다고 표현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희생을 통해 진정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지닌 위대함을 강조했다.

시인은 그 위대함의 극치가 3·1절이 아닐까 되묻는다. 시집은 독립자금을 나르다 고문을 받고 돌아가신 시인의 외할아버지를 통해 본 무명의 삶과 죽음에서 시작됐다. 2부 사과꽃 진혼제에서 저자는 자신이 바라본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무거운 고뇌를 ‘백년전 목소리’ ‘오늘도 아픈 어제’ ‘잃어버린 나라의 사람들에게’ 등으로 담아냈다.

그는 서문에서 “꽃이 뜨겁고 매혹적인 건 죽음을 품어서”라며 “꽃처럼 허망하게 사라진 이름 모를 이들의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집은 역사에 대한 성찰은 물론 현실 속 혼란과 고통, 꿈과 절망, 경제적 궁핍, 삭막해지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고민도 녹여냈다. 특히 체육계 미투 운동 시발점이 된 심석희·신유용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쓴 시 ‘소금 눈보라’가 눈에 띈다. ‘소녀들을 미친 듯이 파먹은 나쁜 사내가 있지/식민지를 파먹던 일본 놈들과 다를 바가 없지’처럼 거칠지만 통렬하게 현실을 꼬집는 등 시대가 요구하는 모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신 시인은 시집과 함께 《아일랜드 축복 기도-세계 기도시 모음집》도 냈다. 로버트 브라우닝, 레이첼 나오미 레멘 등 세계 유명 시인들의 기도시를 실었다. 이와 함께 한용운, 윤동주, 도종환, 이해인 등 국내 대표 시인부터 한경신춘문예 2016년 시 부문 당선자인 이서하 시인의 ‘우리집’과 2017년 당선자인 주민현 시인의 ‘사월의 종이 울리면’까지 젊은 시인들이 쓴 기도시도 담았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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