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 올리는 선배 탓에 화들짝
사적인 얘기 들킬라
단톡방 폭파하고 '사이버 망명'
[ 이우상 기자 ]
![](https://img.hankyung.com/photo/201903/2019032531571_AA.19253143.1.jpg)
최근 연예계 단톡방에서 오간 이야기와 사진 등이 과거 범죄 행위의 증거물로 쏟아져 나오자 김과장 이대리들의 단톡방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별 생각 없이 해오던 ‘찌라시’ 공유는 그만뒀다.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 앱(응용프로그램)으로 단톡방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도 빈번하다. 단순 친목을 위한 단톡방부터 회사나 학교 동문회 단톡방 등 미우나 고우나 단체 채팅방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김과장 이대리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사이버 망명에 ‘불시 검문’까지
스포츠웨어 제조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34·여)은 뉴스로 정준영 사건을 접한 뒤 대학교 여자 동기들과의 단톡방을 ‘텔레그램’으로 옮겼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를 둔 해외 메신저 앱이다. 수사 요청이 와도 텔레그램 본사조차 열람할 수 없는 비밀 대화방 서비스가 있는 데다 시간이 지나면 대화 자체가 서버에서 삭제되는 기능도 있다. 김 과장은 “지인들이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는 알림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뜬다”며 “대단한 비밀 얘기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사적인 이야기라도 한순간에 공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불똥이 튀어 ‘연애 사업’에 차질이 생긴 김과장 이대리도 있다. 석유화학회사에 다니는 권 대리(33)는 최근 여자 친구에게 카카오톡 단톡방 검사를 당했다. ‘불시 검문’은 ‘비극’으로 이어졌다. 친구들과 공유한 야한 사진 등을 본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한 것. 권 대리는 “연예인 비키니 사진 등을 들키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며 “여자 친구가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해 싹싹 빌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권 대리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도 단톡방을 나갔다. 권 대리는 “다른 친구들도 여자 친구의 불시 카카오톡 검사를 막을 명분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신기술에 밝은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국내 메신저 앱 대신 외국 메신저 앱을 쓴 지 오래다. 성남 판교 IT 업체에서 일하는 최 매니저(33)는 아예 카카오톡을 스마트폰에서 삭제했다. 일할 때는 업무용 메신저 ‘슬랙’을 쓰고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는 텔레그램에서 한다.
최 매니저는 “많은 지인이 사용하는 카카오톡이 없으면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안 써도 별일 없더라”며 “카카오톡만 쓰셨던 부모님의 스마트폰에도 텔레그램을 깔아드렸다”고 했다.
공인도 아닌데…불안한 김과장 이대리
나오고 싶다고 해서 내 맘대로 나올 수 없는 단톡방 때문에 속앓이하는 김과장 이대리도 많다. 서울시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우 과장(39)은 “비슷한 연차 남자들만 들어있는 구청 공무원 단톡방이 있는데 다른 부서 선배가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준영 동영상 보는 법’ ‘유출 연예인 리스트’ 등을 계속 올려댄다”며 “선배 눈치가 보여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올 수도 없어 노심초사”라고 말했다.
정유회사에 다니는 유 대리(32)는 정준영 사건 이후 고등학교 동문 단톡방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유 대리는 “눈치 없이 야한 영상을 자꾸 공유하는 선배가 있는데 학교 동문 카톡방이라 함부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냥 아예 없는 셈 치고 산다”고 했다. 이어 “그냥 단톡방에 포함만 돼 있어도 성폭력 공범자 또는 방관자가 되는 것 같아 찝찝하다”고 덧붙였다.
사내 기밀 보호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움직이는 곳도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 상무(59)는 며칠 전에 회사로부터 최신 스마트폰을 받았다. 회사가 앞으로 6개월마다 최신 폰으로 바꿔준다고 했다. 이 상무는 “언제든 수색당할 수 있는 간부의 휴대폰에 오랜 기간 기밀 정보가 쌓이는 걸 회사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주위 대기업 임원들은 더 빠른 주기로 전화기를 바꿔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IT 기업에 다니는 채 대리(34)는 친구들의 전화기를 초기화해주는 가욋일을 하고 있다. 삭제한 내용까지 복구해 증거물로 활용하는 ‘디지털 포렌식’이란 단어가 뜨면서 불안해하는 친구들의 스마트폰 저장기록을 지워주고 있는 것. 초기화를 3회 이상 한 뒤 별도의 앱으로 다시 한번 청소하는 게 ‘비법’이라고 했다.
“불법 영상 등을 공유하는 건 문제지만 일반인들도 사적인 내용이 공개될까 불안해한다는 게 과연 건전한 사회 분위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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