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손타쿠'의 일본

입력 2019-04-08 18:03  

백광엽 논설위원


[ 백광엽 기자 ]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06년 최연소 총리에 선출된 뒤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활력과 친절이 넘치는, 세계에 열린 아름다운 나라’라는 국가상(像)을 제시한 이 책은 50만 부 넘게 팔렸다.

아베 총리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일본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다. 음식에도 오로지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만든 메뉴가 있을 정도다. 이런 특유의 미학은 깨끗함, 질서정연함, 꼼꼼함 등으로 표출되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약탈도, 방화도, 정부 비판 집회도 없이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빨간불이라도 함께라면 건넌다’는 일본인들의 집단주의와 결합하면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조직 내의 아름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은 덮는다”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서 부끄럽고 어두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라는 분석이 많다.

‘아름다운 일본, 일등 일본’을 강조하는 아베 시대에 ‘손타쿠(忖度, 촌탁)’가 최대 유행어로 부상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손타쿠는 ‘타인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배려의 의미가 있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상부(上部)의 심기를 살피고 알아서 긴다’는 부정적 의미로 확산되고 있다. 쓰카다 이치로 국토교통성 부대신(한국의 차관급)이 “아베 총리의 지역구 도로사업을 내가 손타쿠했다”고 실언한 뒤 파장이 커지자 사임한 사건 때문이다.

아베 부인 아키에 여사가 명예교장으로 있는 사립학원에 일본 재무성이 국유지를 헐값 매각하면서 크게 유행했던 단어가 불과 1년 만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당시 아베 총리가 “아내의 관여가 밝혀지면 총리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하자 ‘무관하게 만들라는 손타쿠 지시’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손타쿠는 일본인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처세법으로 꼽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아베 시대의 일본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강한 울림을 주는 말은 없다”고 했을 정도다. 일이 잘 풀리면 보상이 주어지고, 탈이 생기면 전적으로 아랫사람이 책임지는 방식의 인치(人治)형 조직문화다.

일본의 집단주의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에 ‘그것 보라’며 우쭐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박근혜 정부 시절 경제부총리가 한국은행 총재를 만난 뒤 “금리의 금자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이라며 공개압박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검찰과 법원에까지 ‘촌탁’을 압박한다는 의구심이 광범위한 게 현실이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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