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섀드볼트·로저 햄프슨 지음 / 김명주 옮김
을유문화사 / 496쪽 / 1만8000원
[ 윤정현 기자 ]
“오늘날 세계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있다. 그 가운데 192종이 털로 덮여 있다. 예외인 단 한 종은 스스로를 호모사피엔스라고 칭하는 벌거벗은 유인원이다.”
1967년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쓴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의 한 부분이다. 유인원이 벌거벗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들은 공통적으로 ‘불의 사용’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인류에 온기를 제공한 이 도구 덕에 주거지와 먹거리에 변화가 생겼다. 머물 수 있는 영토의 범위를 넓혔고 조리한 음식으로 소화하는 데 에너지를 덜 소비할 수 있었다. 남은 에너지는 뇌를 더 키웠고 커진 뇌는 도구 활용 능력을 높였다.
영국의 인공지능(AI) 과학자인 나이절 섀드볼트와 이론경제학자인 로저 햄프슨이 함께 쓴 《디지털 유인원》은 모리스의 책에서 제목을 변형해 가져왔다. 오늘의 인간이 손에 쥔 새로운 도구는 디지털 기술이다. 책은 인간이 도구를 만든 게 아니라 도구가 인간을 만들었음을 전제로 기술이 변화시킬 세상과 그 속의 인간을 들여다본다.
인간의 도구 사용은 언어에 앞섰다. 초기 인류는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기 300만 년 전부터 도구를 활용했다. 저자들은 “그것은 현대 인류가 출현한 결과가 아니라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며 “현대 생활 환경의 대부분은 호모사피엔스를 출현시킨 도구를 계승하고 사용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불과 최근 20년 사이 스마트기기의 등장과 함께 바뀌어가는 우리의 삶을 그려낸다. 기술 환경의 특징뿐 아니라 경제학과 심리학, 철학과 인류학의 맥락에서 사회적 변화를 아우른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은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풀어간다. ‘디지털 유인원의 출현’ 이후 ‘사회적 기계’ ‘인공 지능과 자연 지능’ ‘새로운 동반자’로 이어지는 목차가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기술이 인간의 본능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사이버 전쟁과 무너지는 사생활에 대한 우려는 현실이 될까’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까’ 등 스스로 질문을 던져가면서 읽으면 한층 이해하기 편하다.
데이터 주권과 관련한 7, 8장도 눈길을 끈다. 세계 유튜브 사용자는 1분에 약 300시간 분량의 새로운 동영상을 업로드한다. 구글에서의 검색 건수는 1분에 350만 건이 넘는다. 같은 시간 1억5000만 통의 이메일이 오가고 70만 건에 이르는 페이스북 콘텐츠가 공유된다. 이렇게 오가는 데이터 통제권은 대부분 일부 플랫폼 기업이 갖고 있다. 저자들은 자신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할 권리는 스스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소수의 기업이 데이터를 독점하도록 두지 말고 데이터 저장소를 주거지와 사무실 건물에 만드는 방법을 제안한다. 저자들은 “공적인 데이터는 공개하고 사적인 데이터는 안전하게 간수해야 한다”며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정부는 열려 있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집단의 지식을 하나로 모으고 그것을 공유하는 위키피디아 같은 ‘사회적 기계’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디지털 유인원이 맞을 미래에 대한 저자들의 시각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이다. 저자들은 복잡해진 시스템 아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상 밖의 문제들을 핵무기 위협에 비유한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핵무기 ‘버튼’을 누른 사람은 없었다.
로봇의 확산에 따른 부작용과 관련해서도 저자들은 “인공지능은 자의식을 획득할 수 없고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직업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라며 “로봇의 반란이나 로봇 확산에 따른 대량 실업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간의 지능과 기술에 기반한 능력의 확장성, 의사소통을 통한 집단지성도 낙관론의 근거다.
매력적인 제목과 풍성하고 짜임새 있는 본론이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다소 진부한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쉽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방향을 가늠해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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