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잠들기 전 주문하면 내일 아침 일어나기 전 도착해있다.” 새벽배송은 물류전쟁의 최전선이다. ‘신선식품 샛별배송’을 콘셉트로 시장을 연 마켓컬리에 이어 쿠팡이 뛰어들었고 대형 유통업체들까지 가세했다. 이제 익일배송은 ‘한가로운 소리’가 되었다.
극적인 시간단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핵심이다. 고객이 주문하면 발주하는 기존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데이터는 고객 패턴을 읽고 예측할 수 있도록 했다. 다음 단계는 AI다. 데이터 기반으로 물품을 찾아 배송하는 절차를 최적화·효율화한다. 식당에 비유해보자. 일일이 주문받은 뒤 조리를 시작하는 건 전통적 배송과 흡사하다. 손이 빠른 식당은 다르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와 잘 팔리는 메뉴를 고려해(AI로 데이터 분석) 적정량의 기본 육수를 끓여놓고 주문에 맞춰 척척 음식을 내놓는다(예측주문 및 새벽배송).
지난 13일 한국유통학회 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새벽배송 사례에 주목했다. “유통과 물류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 밑단은 신기술 선점 전쟁이다. 기술을 선도하지 못하면 생존이 위협받는다.” 새벽배송은 어느새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 '동전의 양면' 폐기율과 매진율
새벽배송 업체들이 데이터와 AI를 다루는 방식은 감탄을 자아냈다. 시간단축을 위해 사전예측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예측은 직관에 의존하지 않는다. 의사결정 근거는 데이터다. 재고, 판매량, 소비패턴 등을 분석해 ‘미리’ 가져다두는 것이다.
쿠팡은 전체 직원의 40%가 개발자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라기보단 정보기술(IT) 회사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창고 관리시스템 ‘랜덤 스토(Random stow: 무작위로 넣는다)’부터 AI와 빅데이터를 적용했다. 품목별로 딱딱 나눠 진열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다. 똑같은 품목도 이곳저곳 일정 분량씩 놓아둔다. 랜덤이라 명명했으나 실은 AI로 계산된 ‘무질서의 질서’다. 주문 및 입·출고 빈도, 물품 특성 등을 감안해 배치했다는 게 쿠팡의 설명. 이렇게 하면 동선이 확실히 짧아진다. 물품 현황, 위치 등에 대한 시스템의 실시간 추적이 뒷받침된다.
마켓컬리는 상당수 언론에 새벽배송 과정을 공개했다. 회사측이 강조하는 ‘신선식품 폐기율 1%’가 AI·빅데이터 시스템의 결과임을 눈앞에서 보여줬다. 마켓컬리 소속 데이터 전문가 20여명이 운영하는 AI 시스템 ‘데이터 물어다주는 멍멍이’가 30분 단위로 실시간 매출, 주문 건수, 재고량 등을 알려준다. 일반 대형마트의 신선식품 폐기율 2~3% 수준을 크게 밑돈다.
폐기율 최소화, 즉 재고 관리는 기업 이익과 직결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소비자 관점은 다르다. 서울 거주 30대 워킹맘 이모씨는 “새벽배송 시키려 해도 매진된 품목이 많더라”고 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업체 입장에선 매진은 곧 재고율 0%, 문제 될 게 없다. 이익 극대화다. 하지만 소비자 선택권은 제한된다. 매진율이 너무 높으면 그 업체를 외면할 수도 있다.
최근까지 유통학회장을 지낸 박주영 숭실대 교수는 “고객들이 주문 가능한 품목이 얼마 안 된다고 느낀다면 큰 문제다. 재고 관리 못지않게 소비자 선택권 보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가격을 원가보다 높게 책정하는 패션업계 사례를 들었다. 그는 “패션은 (신선식품 못지않게) 재고를 줄이는 게 관건이다. 유행이 지나면 소비자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라며 “폐기율뿐 아니라 매진율까지 감안해 AI·빅데이터 시스템을 정교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매진율을 별도 파악해 공개하는 업체는 없다.
◆ AB는 기본, 차별화 포인트는 C
빠른 배송의 원조는 아마존이다. 새벽배송의 근간인 데이터 기반 물류 관리, 랜덤 스토 시스템 등이 아마존에서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 대표적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마존은 배당 없이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그 대부분이 AI와 빅데이터에 투입됐다. 엄청난 시가 총액에 비해 영업이익은 크지 않다.
쿠팡이 ‘한국판 아마존’ 전략을 구사해온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매출과 적자 규모가 동반 급증했다. 쿠팡의 작년 매출은 국내 이커머스 사상 최대인 4조4227억원, 전년 대비 성장률도 65%였다. 영업손실 역시 1조970억원에 달했다. 물론 쿠팡의 최우선 목표는 판을 키워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소비자 반응도 좋다. 경기도 거주 40대 직장인 유모씨는 “다른 커머스를 쓰다가 요즘은 쿠팡에서만 시킨다. 배송이 빠를 뿐더러 배송비 부담도 없다”고 귀띔했다.
다만 쿠팡이 이같은 공격적 투자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쿠팡의 자금줄은 외부에 있다. 지난해 말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20억달러(약 2조2600억원) 투자를 유치했다. 이 대목이 쿠팡과 아마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마존은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하면서 수반되는 핵심 인프라인 클라우드(가상 저장공간)를 사업화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글로벌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 44%의 1위 사업자다. AWS의 작년 4분기 영업익은 21억8000만달러, 소프트뱅크가 쿠팡에 투자한 금액을 뛰어넘었다. 아마존의 지속적 투자 원동력이다.
O2O(온·오프라인 융합) 시대에 AI·빅데이터 활용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글로벌 물류·유통기업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클라우드를 키운다. 〈중국이 이긴다〉 저자 정유신 한국핀테크지원센터장(서강대 교수)은 “알리바바 역시 클라우드 분야에 주력한다. 중국 내수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알리바바는 데이터가 4차 산업시대 원유이듯 클라우드도 3대 생산요소 중 하나인 (가상) 토지 역할을 맡는다고 봤다.
클라우드가 AI와 빅데이터를 구동하는 인프라이자 ‘캐시카우’ 기능도 한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국내 클라우드 산업 전망은 현재로선 그렇게 밝지 않다. 장석권 한국클라우드산업협회 자문위원장(한양대 교수)은 “국내에서도 삼성·LG 등이 클라우드 사업을 하지만 주로 그룹 내 계열사 대상이라 글로벌 클라우드 업체들과의 경쟁이 쉽지 않다”고 짚었다. 새벽배송 출혈경쟁을 넘어 AI·빅데이터 활용과 함께 밑단의 클라우드가 동반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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