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스스로 불법현수막 내거는 구청

입력 2019-04-21 17:18  

배태웅 지식사회부 기자 btu104@hankyung.com


[ 배태웅 기자 ] 지난 17일 서울시 도시빛정책과 소속 불법 현수막 단속반과 현장 동행취재에 나섰다. 중랑구에 있는 사가정역 사거리 부근에 도착하자 대로변을 가득 메운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랑구청에서 여는 ‘행복농장 행사’ 안내부터 서울시가 주관하는 ‘서울도시농업문화여행’ 등 정부 행사를 홍보하는 내용이지만 모두 지정된 게시 위치를 벗어난 불법 현수막이다. 단속팀은 “불법 현수막의 상당수가 공공기관에서 내건 것”이라고 혀를 찼다. 이날 단속반이 수거한 불법 현수막 10개 중 6개가 행정기관에서 붙인 것이었다.

서울시와 각 구청이 지난달 적발한 불법 현수막 현황을 보면 철거한 909개 중 399개가 행정기관에서 설치한 것이다.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다. 관할지역 내에서 불법 현수막을 단속할 권한과 책임이 있는 구청이 오히려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데 앞장선 셈이다. 현장에 함께 나선 시청 단속반도 “구청의 불법 현수막을 수거하는 게 주된 일”이라며 “구청이 불법인 걸 뻔히 알면서도 붙이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옥외광고물관리법은 신고하지 않고 현수막을 설치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태료를 부과할 권한이 각 구청에 있다 보니 구청이 내건 불법 현수막은 사실상 단속되지 않는 실정이다. 보다 못한 서울시는 2016년부터 자체 불법 현수막 단속반을 가동해 이를 철거하고 있다. 하지만 10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서울 시내 25개 구를 샅샅이 단속하긴 버겁다는 게 단속반의 설명이다.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다. 구청은 민간인이 붙인 상업용 현수막은 법대로 처리하면서 자신들이 설치한 불법 현수막은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잦다. 구청은 공익적 목적을 감안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한 구청 관계자는 “구청이 붙이는 현수막 중에는 공공 캠페인이나 주민에게 필요한 행정을 안내하는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 불법 현수막을 내거는 구청이 단속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서울시가 수거한 불법 현수막은 51만 개에 육박한다. 서울에 불법 현수막이 넘쳐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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