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하이메 아욘 디자인展
롯데뮤지엄은 제임스 진 불러
[ 김경갑 기자 ] 미술시장이 좀처럼 활기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알록달록한 해외 미술이 국내 화단을 점령하고 있다. 2015년 이후 국내 화단을 지배한 단색화 열풍이 한풀 꺾이면서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의 해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과 화랑의 경쟁이 더욱 뜨겁다. 많은 전시공간이 해외 작가 작품들로 채워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작가들의 설자리가 좁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 주요 화랑과 미술관은 스페인 산업디자이너 하이메 아욘을 비롯해 영국 인기작가 데이비드 호크니, 스위스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 독일 작가 니콜라스 보데, 대만 출신 작가 제임스 진, 미국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 등 해외 작가들의 전시회를 열거나 개막을 준비하고 있다. 팝아트, 난해한 개념미술, 첨단기술을 곁들인 미디어아트, 추상화, 사진예술, 디자인 등 장르도 다양하다.
해외 미술 들여오는 미술관들
대림미술관은 지난달 27일 스페인 산업디자이너 하이메 아욘의 국내 첫 개인전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의 막을 올렸다. 디자인, 가구, 회화, 조각 장르를 넘나드는 아욘 특유의 작품전으로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이다. 대림은 지난 5년 동안 ‘카를 라거펠트 사진전’ ‘핀 율 탄생 100주년’전, ‘북유럽 가구이야기’전, 스와로브스키 전시회,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 스페인 작가 코코 카피탄 개인전 등을 잇달아 열어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롯데뮤지엄도 해외 미술가 유치에 적극적이다. 유명 미술가를 통해 미술관의 브랜드와 사회공헌 가치를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작년 1월 개관전으로 미국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댄 플래빈을 소개한 데 이어 현대 회화의 거장 알렉스 카츠, 팝아티스트 케니 샤프를 잇따라 불러들였다. 최근에는 대만계 미국 작가로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임스 진의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성곡미술관은 미국 변호사 출신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을 초대했고, 뮤지엄 그라운드(르네 마그리트 사진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베르나르 뷔페)도 다채로운 장르의 전시를 수입해 흥행몰이에 나선다.
국공립미술관들도 뒤질세라 해외 미술 전시에 속속 가세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해 마르셀 뒤샹의 회고전을 열어 관람객 24만 명을 불러모은 데 이어 지난달부터 덴마크 미술가 아스게르 요른의 작품전을 열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3월 말 영국 테이트미술관과 협력해 세계적인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133점을 들여왔다. 보험가액만도 총 3500억원에 달한다.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어서인지 한 달 만에 관람객 3만 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해외 작가 유치 치열한 화랑가
상업화랑들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비교적 작품 거래가 활발한 해외 작가들의 국내 작품 판권을 확보해 라인업을 공개하고 전시 일정을 짜고 있다. 최근 주식과 부동산 투자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해외 미술품이 투자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갤러리현대는 가느다란 선으로 가상의 세계를 연출한 미국 작가 프레드 샌드백(8월)과 토마스 사라세노(10월)의 개인전을 열어 해외 미술품을 선호하는 강남권 기업인과 주부들을 공략할 계획이다. 국제갤러리는 오는 16일 스위스 출신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를 초대해 성(性), 권태, 자연을 주제로 다룬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학고재갤러리는 젊은 미술투자자들이 선호하는 작가로 진용을 구축했다. ‘학고재청담’은 토마스 샤이비츠의 개인전이 5일 끝나는 대로 영국 신진작가 톰 안홀트를 소개할 예정이다. 예화랑은 독일 작가 니콜라스 보데를 불러들여 알루미늄 캔버스에 수없이 수평선을 긋는 방식으로 제작한 근작 20여 점을 내보인다.
국내에 진출한 해외 화랑들 역시 외국 작가 작품 판매전에 돌입했다. 페이스갤러리는 오는 25일까지 프랑스 작가 나탈리 뒤 파스키에의 작품을 전시하고, 리만머핀갤러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니콜라스 슬로보의 작품을 걸어 ‘강남 아줌마’ 잡기에 나섰다.
설자리 잃어 가는 한국 작가들
미술관과 화랑들이 앞다퉈 해외 작가를 유치하는 것은 최근 미술애호가로 급부상한 30~50대가 미국 유럽 등 해외 미술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난해 미술애호가와 아트딜러, 기업 등이 해외에서 들여온 미술품 수입액은 2000억~3000억원대로 추정된다. 미술관과 화랑이 해외 미술 전시를 통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기량이 뛰어난 국내 작가들의 ‘왕따 현상’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한국미술을 육성해야 할 국공립미술관들조차 해외 미술 전시에 열을 올리고,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미술관들은 외국 전시로 흥행몰이에 여념이 없다”며 “가뜩이나 힘든 국내 작가들의 설자리가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도 “지금 백화점에 가면 전부 외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명품관을 차지하고 있다”며 “미술계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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