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반값 등록금 11년…대학 매물 쏟아진다

입력 2019-05-12 17:41  

'반값 등록금' 11년, 위기의 대학
(1) 미래투자 엄두 못내는 한국 대학



[ 김동윤/정의진 기자 ] 최근 한국외국어대는 부산·경남지역 A사립대로부터 “우리 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A대학은 의대가 있는데도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한국외대는 학교를 통째로 인수할 여력은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이 지역 B대학에서 똑같은 제안을 받았다. 한국외대 관계자는 “등록금 동결 정책으로 대학들이 운영을 포기할 정도로 재정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며 “의대가 없는 지방 사립대들은 수년 전부터 매물로 나와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2009년 시작된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대학들의 재정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사립대의 평균 연간 등록금은 약 718만원으로 2008년 대비 0.6% 올라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 등록금으로 따지면 같은 기간 16.5% 하락했다. 대학 자체 수입의 60%가량을 차지하는 등록금이 장기 동결된 탓에 2016년부터는 사립대의 운영지출이 운영수입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상당수 대학이 적자 운영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대교협 관계자는 “일부 대학은 적립금을 헐어서 운영비를 메우고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파른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빈발했다. 지금은 이런 풍경이 사라진 대신 대학의 경쟁력은 추락하고 있다.


한국 대학의 위상 하락은 대학 경쟁력 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QS대학평가에서 한국 대학들은 2014년까지만 해도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이 새롭게 아시아 상위 20위 대학에 진입했다. 2015년 이후부터는 새로 진입한 대학이 한 곳도 없다. 서울대의 순위는 한때 아시아 4위까지 올라갔지만 작년엔 10위에 그쳤다.

서울의 한 사립대 기획부처장은 “대학의 재정 악화는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부메랑’이 돼 한국 사회 전체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AI 대학 설립에 1조 투자하는 MIT…석학 1명 영입도 힘든 韓 대학

“한국 대학들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경쟁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서울의 한 사립대 예산팀장은 “반값 등록금이 정말 대학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나”란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세계 주요 대학이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지만 한국 대학들은 ‘반값등록금’ 정책에 발목이 묶여 미래를 위한 투자에 나설 수 없다는 걱정이었다. 또 다른 사립대 기획처장은 “등록금 동결로 인한 대학 경쟁력 하락이 조만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재 떠나는 한국 대학들

한 국내 사립대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인공지능(AI) 분야 석학인 A씨를 교수로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A씨는 미련 없이 삼성전자를 선택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우리 학교에서 신임 교수에게 제시할 수 있는 연봉은 1억원을 넘지 못하지만 기업들은 우수 인재에게 2~3배의 연봉을 준다”며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연구자를 데려오려면 고액연봉뿐 아니라 전용 연구시설, 기본 연구비용 등을 모두 제공해야 하는데, 국내 대학의 재정 상황으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에 있던 우수 연구자들도 하나둘 기업으로 떠나고 있다. 한양대에선 반도체 전문가 송용호 융합전자공학부 교수가 지난달 초 사표를 내고 삼성전자로 떠났다. 차국현 서울대 공대 학장은 “예산 부족으로 첨단 산업 분야에서 우수 연구자를 기업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혁신적인 연구개발(R&D) 성과로 기업을 선도하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사립대 총장은 “현실적으로 보면 대학의 경쟁력도 결국 ‘머니게임’”이라며 “좋은 교수를 뽑고, 좋은 인프라를 만들어 학생을 길러내면 산업계로 흘러가는데, 대학에서 ‘보틀넥’이 생기면 국가 전체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AI·빅데이터·로봇 등의 신산업에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지만 국내 대학은 이들 분야의 R&D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국내 전체 사립대의 자체 R&D 예산 규모는 2011년 5397억원에서 2017년 4470억원으로 17.2% 줄었다.

블룸버그통신이 작년 10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10억달러(약 1조1600억원)를 들여 AI대학을 설립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을 때 서울대·연세대·고려대 공과대학 관계자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들 대학 역시 AI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 관련 연구소(또는 학과)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그나마 고(故)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이 500억원을 기부해 AI연구센터 설립을 추진할 수 있게 됐지만, 다른 대학들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15년 전 중국 칭화대를 방문했을 때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서울대가 쫓아가질 못한다”며 “망가진 국내 대학의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재정확충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존폐 기로에 선 지방 사립대

서울 주요 사립대에 비해 신입생 모집이 어려운 지방 사립대들은 존폐를 고민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호남지역의 한 사립대는 최근 주변 대학과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압박으로 등록금을 인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년째 신입생 정원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결된 등록금이라도 납부해줄 학생이 줄어들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생존을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는 전임교원 임금을 삭감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 대학 기획처장은 “수년째 긴축재정이 지속되고 있다”며 “입학금마저 폐지되면서 그나마 동결했던 전임교원 임금을 삭감하는 것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도 2학기부터 시행돼 재정 부담 요인이 단기간에 중첩되고 있다”며 “시간강사 대신 초빙교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비용 절감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 대학은 재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학과를 통폐합하고 보유 건물을 매각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이 건물 등 기본재산을 팔려면 별도로 교육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 지방 사립대 예산팀장은 “지방대 교직원끼리 모이기만 하면 비용 절감 방법 얘기가 나온다”며 “일부 대학은 건물을 매물로 내놓을 정도지만, 고작 건물 하나 팔아서는 종합대학 1년 예산에 큰 도움이 안돼 근본적 해결책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반값 등록금 정책

학생들의 실질 등록금 부담을 절반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2012년 본격 시행됐다. 이를 위해 정부는 소득수준과 연계한 국가장학금 제도를 도입했다. 대학들에는 등록금을 인상하면 정부의 재정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등록금 동결을 강요했다. 상당수 대학은 반값 등록금 관련 논의가 한창이던 2009년부터 등록금을 동결했다.

김동윤/정의진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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