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아동혐오'가 있다.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으며 민폐를 끼치는 존재,
어른들의 세계에서 배제할 타자로 보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장난을 좋아했던 나는 형을 크게 다치게 한 적이 있다. 형이 간지럼을 태우자 나는 주먹을 크게 휘둘러 실수로 얼굴을 때렸다. 안경을 썼던 형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남을 상처가 생겼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장난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모님에게 형은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고,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형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고, 항상 미안했다. 형의 상처는 최근에서야 다 아물었다. 그리고 형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나를 용서해주고 다독여준 것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라면 형처럼 어린이들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실수를 하면 자란다. 나도 그렇게 자랐고,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다. 실수를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어른들의 ‘배려’ 덕분이다. 단지 덜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관용과 호의를 베풀기 때문에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큰 개체가 작은 개체를 배려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사회를 배울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무조건 화부터 내지 않고 잘못을 이해시키고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큰 개체의 몫이다. 이런 큰 개체의 배려가 아이들을 반듯하게 성장시킨다. 그런데 최근 이런 배려는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든다는 이유로, 장소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말을 함부로 한다는 이유 등으로 ‘아동혐오’ 정서가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 많아졌다는 아동 금지 가게, 이른바 ‘노키즈존’의 배경에는 일종의 ‘아동혐오’가 있다.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으며 민폐를 끼치는 존재, 어른들의 세계에서 배제할 타자로 보는 것이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는 야간 출입 금지, 소음에 대한 관용 감소, 상가 출입 제한 등을 거론하면서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이들을 ‘문제’ 또는 ‘비행을 저지르는 존재’로 여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삶이 피폐해질수록 ‘어른들’은 아이들과 공존하려는 여유가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들이 그 배려를 당연시 여기지 않기까지 성장하도록 관용과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김재환 생글기자(경희고 2년) ktkk224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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