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직장인 대상 익명 게시판 앱인 ‘블라인드’에 접속했다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데이트를 해줄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찾는다”는 게시글을 봤기 때문이다. 해당 글 작성자는 “최저임금을 맞춰주고 ‘일할’ 때마다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다.
직장내 부조리를 고발하는 장이었던 ‘블라인드’가 최근 남녀간 ‘만남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외모와 스펙, 취미 등을 소개하는 ‘셀프소개(셀소)’ 글과 미팅 제안 글이 쏟아지면서 관련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지나치게 성적인 글이 범람하다보니 이용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불륜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블라인드 미팅 게시판
블라인드는 본래 직원들이 회사에서 겪은 부당한 일을 고발하는 창구로 인기를 끌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여성 승무원 신체접촉 의혹 등이 이 앱에서 폭로됐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 게시판’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 없이 회사 내 문제들을 외부에 고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블라인드에서 지분을 늘려가는 건 연애 관련 글이다. “30대 초반 남자 셀소합니다. 키는 173센티미터에 보통 체격이고, 주량은 한 병 반. 취미는 책 읽기랑 맥주 한 잔 하기…”의 셀프소개글과 “강남역에서 2대 2로 미팅할 남자분들 찾아요” 같은 미팅 제안 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블라인드는 익명 게시판이지만 게시글 작성자의 직장이 드러나기 때문에 ‘1차 인증’이 가능하다. 주제별 채널(게시판)에선 연애·결혼, 19+(성인) 채널이 직장인 재테크 채널 등과 더불어 인기가 높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온라인에서는 오프라인보다 호감을 표시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데 노력이 덜 필요하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적다는 점이 한몫을 한다”고 말했다.
만남 관련 게시글이 급증하자 블라인드 측은 지난 8일 ‘셀소·미팅 채널’을 아예 새로 만들었다고 공지했다. 회사 관계자는 “하나의 채널을 별도로 만들 만큼 관련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고, 사용자들의 요청도 많다”며 “채널이 생기면 이용자가 채널의 게시글을 볼 지 안 볼지 여부를 설정할 수 있어 관련 글을 보고 싶지 않은 이용자에게도 낫다”고 설명했다.
‘익명’이라 게시글 통제 및 관리 어려워
블라인드 측은 셀소·미팅 채널 소개 글에 ‘성적 불쾌감을 유발하는 게시물을 올리면 숨김 처리될 수 있고 작성자도 영구정지될 수 있다’는 경고 문구도 함께 넣었다. 잘못된 성적 표현 등으로 이용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들이 빈번히 올라오기 때문이다.
5월 중순부터 지난 22일까지 기자가 블라인드에 접속해보니 기혼자들이 ‘품절녀(기혼 여성)를 찾는다’는 대화방이 다수 보였다. 미혼 여성의 셀프소개 글에 ‘유부남도 가능하냐’는 댓글까지 달렸다. 한 이용자는 “여자친구와 만나러 간다는 글에 최근 버닝썬 사태로 논란이 된 ‘물뽕(GHB)’을 쓰라는 댓글이 달린 것을 봤다”며 “문제제기를 했더니 댓글이 지워졌다”고 지적했다.
자루 블라인드를 이용했다는 직장인 이씨(27)는 “만남 전용 앱인가 싶을 정도로 관련 글이 자주 올라오고, 보기 싫은 게시글들이 요즘 너무 많아 최근 블라인드 앱 자체를 접속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지난달 구글 플레이스토어에 블라인드 앱에 대한 리뷰를 남긴 한 사용자는 “그룹채팅에는 19금 만남을 원하는 남성들만 가득하고, 여자 회원들은 쪽지로 성희롱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익명’이다보니 여자 회원들이 언어적 성희롱을 당하는 피해를 보고 있다. 불쾌한 게시글이 다수 올라오더라도 ‘익명’ 방식이라는 앱의 특성상 통제 및 관리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블라인드 측이 익명 보장을 위해 회원의 이름과 나이 등을 수집하지 않기 때문에 블라인드 내 성희롱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블라인드 측에서는 “쪽지를 통해 개인정보를 교환할 경우에는 신원을 특정할 수 있지만 블라인드 정보만으로 법적 조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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