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입 짧은 아이

입력 2019-05-28 17:25  

최연호 < 성균관대 의대 학장·소아청소년과 i101016@skku.edu >


아이가 잘 안 먹고 못 자라는 것만큼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다. 질병 없이 건강한데, 더 먹이려 하면 입을 돌리고 피하는 아이가 있다. 한 끼에 두 시간 넘게 걸리니 먹이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영유아 검진을 위해 병원에 갔더니 성장이 최하위라 더 먹여야 한단다. 할머니는 “왜 이리 안 먹였냐”며 엄마 잘못으로 돌린다. 퇴근한 아빠는 오늘도 잘 안 먹었냐고 짜증을 낸다. 엄마는 미칠 지경이다. 눈물만 하염없이 흐른다.

엄마는 전문가를 찾았다. “아이가 잘 안 먹고 구역질도 해요.”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검사를 시작한다. 위내시경 결과 위식도 역류증과 알레르기 위장관염이 의심된다고 해서 12주간 약을 복용했는데 아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음식 알레르기 때문에 제한 식이를 하니 아이는 더 안 먹고 토하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구역질과 구토는 먹기 싫어서 그런 것 같다. 답답한 엄마는 다른 병원을 찾아 필자에게까지 오게 됐다.

입 짧은 아이의 음식 거부 현상. 이런 아이들은 원래 먹는 데 관심이 없고 미각이 예민하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조상이 독성 식물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인간은 녹색의 쓴 음식을 거부하게 됐다. 특히 보호자가 없을 때 아이가 결정해야 하는 환경에서 해가 되는 음식을 피하려는 생존 메커니즘은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됐다. 아이들은 타고나길 채소를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결국 바뀐다. 입 짧은 아이 중 후각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싫은 음식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미리 거부한다. 다른 감각과 달리 냄새는 시상(視床)을 통하지 않고 바로 대뇌로 향한다. 200만 년 전 조상도 맹수 등 침입자의 방어에 후각을 사용했지만 인간은 시각이 발달하며 후각 기능이 퇴화됐다. 후각을 관장하는 뇌는 인간의 기억과 정서를 다스리는 변연계에 속해 있다. 이에 후각 기능은 일종의 ‘기억의 뇌’로 많이 편입됐다는 추측도 있다.

어른이 되면 바뀔 것인데도 아이가 못 자랄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그 두려움을 피하고자 애꿎은 아이에게 섭식을 강요하고 트라우마를 준다. 대부분의 원인은 보호자의 욕심과 손실기피 현상 그리고 의료진이 유발한 의원병이다.

필자에게 온 환자를 파악하고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이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먹는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돌려주세요.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주십시오. 우리가 먹이고 싶어 하는 것은 주지 마십시오. 먹는 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3개월 후 아이의 체중은 전보다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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