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도 해체 수순
韓 '전략적 모호성' 버리고 최악 대비해야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장 >
이제서야 세상은 확실히 알게 된 듯하다. 미·중 무역전쟁은 미·중 패권경쟁의 곁가지고, 핵심은 기술전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기술굴기’를 막으려는 의지와 전략으로 충만하다. 이달 초 미국이 제시한 방식으로 무역전쟁을 봉합하는 것에 중국이 반발하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의 세계적 통신제조기업 화웨이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와 부품 등의 수출금지 명령을 내렸다. 오래전부터 풍문으로 나돌던 이야기가 현실화된 것이다.
미국산 핵심 부품에 의존해온 화웨이는 치명타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제공해온 구글, 반도체 설계기술을 제공해온 영국 ARM의 거래중단 선언은 화웨이에 청천벽력이었다.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이 될 5G(5세대) 시대의 개막을 선도하던 화웨이의 항로에 난기류와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예상치 못한 초강경 압박에 중국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희토류 무기화 가능성을 시사하며 장시성 희토류 생산지역을 순시했다. 또 중국의 미래를 두고 경쟁하던 1930년대 국민당과의 내전에 밀려 패주가 시작된 장시성 위두현을 방문해 결의를 다졌다. 중국 곳곳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중국을 부흥시키고 강국강군(强國强軍)의 꿈을 이루자”는 붉은 구호가 물결치고 있다.
지난 주말 중국의 대외선전매체 역할을 하는 차이나데일리 1면에는 ‘미국이 협박을 거둬들여야 협상할 수 있다’ ‘미국의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세계 공급자들은 여전히 화웨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기사가 배치됐다. 오피니언 면에는 세 개의 칼럼이 실렸는데, ‘중국 경제 장기전망은 유망’ ‘미국 골목대장질 하지 말라’ ‘혁신에 성공하는 나라가 결국엔 이긴다’가 그 제목들이다. 지금 미국의 행태는 중국 현대사에 굴욕을 가져다준 19~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처럼 강압적이고 비도덕적인데, 동요하지 않고 견뎌내면 혁신역량이 강한 중국이 결국 이길 것이라는 선전공세다. 중국은 구조적 하강기에 접어든 불안한 중국 경제에 대한 내적 불만을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중화민족주의 고양의 계기로 삼고 있다.
필자는 최근 펴낸 《미·중 전쟁의 승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에서 “무역전쟁이 끝나도 기술전쟁은 계속된다”고 예측했다. 실제로 그런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에 제출된 미국 정보국의 세계적 위협 평가 보고서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자본집약적 고기술 분야에서 미·중 간 격차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중 무역협상이 한창이던 4월 크리스토퍼 레이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록펠러재단 산하의 미국외교협회 공개연설에서 “중국은 미국의 미래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중국의 위협은 중국 정부에 의해 치밀하면서도 전면적·장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총체적 도전”으로 규정했다.
미·중 기술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기술패권전쟁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체제는 달라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던 세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경제적 이익을 안보와 분리시켰던 차단벽은 사라졌다. 기술은 국적을 초월한다는 말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뉴노멀’ 시대가 됐다. 한때 ‘차이메리카’라고까지 불렸던 미·중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해체되고 붕괴될 전망이다.
차이메리카의 최대 수혜국이던 한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곳곳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초당적으로 국가전략을 세우지 못한다면 한국은 이리저리 내몰리고 시달릴 것이다. 정부는 민간에 책임을 미루고, 민간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혼동과 혼란의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지금까지와 달리 ‘지정학적 리스크’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부상했다.
그간 ‘전략적 모호성’이란 이름 아래 양쪽에 다 걸쳐뒀던 한국은 이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 위협을 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전략적으로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악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혹독한 겨울을 감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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