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삼성, 화웨이처럼 당할 수도"…경영진 연쇄 회의 나선 이재용

입력 2019-06-05 17:41   수정 2019-06-17 10:01

반도체 이어 각 사업부와 회동
美·中 분쟁 전사적 대책 주문



[ 좌동욱/황정수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 지난 1일 반도체 사장단과 긴급회의를 한 데 이어 TV, 스마트폰, 통신장비 등 주요 사업부 핵심 경영진과 연쇄 미팅에 나선다. 실적 악화와 검찰의 분식회계 수사 등 잇단 악재로 흐트러진 임직원의 기강을 다잡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은 첨단 정보기술(IT)산업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정부가 벌이는 패권 전쟁이 삼성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 전사적인 대책 마련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5일 삼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무선사업부, 생활가전사업부, 네트워크사업부 등 삼성전자 주요 사업부 경영진과 만나 글로벌 경영환경 점검 및 대책 회의를 차례로 열 계획이다. 경영진의 기존 일정에 차질을 주지 않도록 가급적 주말 회의를 협의하고 있다. 밀도 있는 논의를 위해 이 부회장을 포함한 참석 인원을 최소화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회사 경영진과 연쇄 미팅에 나서는 것은 2017년 2월 국정농단 재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연 경영진 간담회 이후 처음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상징되는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면 삼성전자도 중국 화웨이처럼 다른 국가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며 “핵심 경영진과 얼굴을 맞대는 자리를 만드는 주요 이유”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작년 美·中 매출 125兆…한 곳만 차질 빚어도 '치명타'

“가라앉고 있는 한국 경제에 삼성이 경보음을 울렸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가 지난 3일 보도한 기사 제목이다. 한국의 부진한 경제 상황과 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재한 반도체 사장단 긴급회의를 대조하는 내용이 담겼다. 경영계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가 떠오른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부 관료, 일부 기업인이 나라 밖에서 들려오는 경보음을 외면하다 위기를 맞았다.


주요 사업부와 연쇄 미팅, 왜?

삼성은 5세대(5G) 통신, 인공지능(AI), 빅데이터와 같은 거대한 신산업 물결이 기존 사업의 경쟁력을 송두리째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부회장은 미국과 중국 정부가 첨단산업을 놓고 벌이는 ‘경제 패권 전쟁’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기업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요일인 1일 반도체·부품(DS)부문 사장단회의를 연 데 이어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무선사업부, 네트워크사업부, 생활가전사업부 등 주요 사업부 핵심 경영진과 연쇄 미팅을 추진하는 이유다.

삼성전자 고위관계자는 5일 “이 부회장은 미국 정부가 중국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화웨이를 집중 공격하듯이 삼성도 어느 한순간 특정 국가로부터 견제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이 반도체 사장단회의에서 “단기적인 기회와 성과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 삼성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이라고 강조한 배경이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여러 채널을 통해 화웨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무차별 공격이 불러올 영향을 시나리오별로 따져보고 있다. 삼성은 미·중 분쟁 강도가 점점 세지고, 기간도 길어지는 점을 극도로 경계한다. 삼성은 미국 정부가 자국 안보를 내세워 삼성전자와 같은 제3국 기업에도 화웨이 등 중국계 기업과의 거래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등 압력을 넣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경영계에서는 삼성전자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가 상황에 따라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와 퀄컴의 통신용 반도체 등은 삼성전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삼성전자가 미국 편에 서면 중국 정부로부터 보복 조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2016년 한국 정부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한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경제 보복에 나서면서 롯데, 신세계 등 국내 유통그룹이 줄줄이 중국에서 사업을 접기도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지역의 사업만 차질을 빚어도 경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244조원) 가운데 미국(33.5%)과 중국(17.7%)이 차지하는 비중은 51.2%에 달했다. 회사 영업이익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반도체 부문은 미국과 중국 사업 비중이 75%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전 임직원 위기의식 가져야”

이 같은 이 부회장의 위기의식을 전 임직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핵심 경영진과의 연쇄 회동을 추진한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1일 반도체 사장단회의의 발언 내용을 외부에 전격 공개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 계열사 핵심 경영진은 이 부회장과 사업부 간 연쇄 회동을 계기로 장단기 위기 대응책 마련에 나설 전망이다. 앞으로 다가올 신(新)보호무역주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D램처럼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이 부회장의 판단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사장단회의 직후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의 대응 방향을 정하고, 동시에 수백조원대의 대규모 투자를 차질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이유다. 삼성은 전 세계 생산거점 및 부품 공급망도 다시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고민은 중장기 전략을 짜야 할 삼성전자 컨트롤타워인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의 주요 경영진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데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와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검찰의 고강도 수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계 관계자는 “한국 경제를 향해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려면 정부와 기업이 한몸처럼 움직이면서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며 “정부도 현 상황을 엄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좌동욱/황정수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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