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정치권 탓하기 앞서 기업들부터 제대로 대응해야
설마 했지만 또 미봉과 땜질로 넘길 모양이다. 노동조합의 장기파업으로 약 3000억원의 손실을 본 르노삼성자동차가 ‘노사 상생선언’ 명목으로 파업기간 임금을 보전해주기로 했다. 지난 8개월간 총 312시간 전면·부분파업을 벌이며 일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각종 일시 보상금(1170만원) 외에 파업기간 중 못 받은 임금을 일부 챙길 수 있게 된다. ‘무노동 무임금’을 고수한다던 회사 측이 스스로 원칙을 허문 것이어서 파장이 심각하다(한경 6월 14일자 A1, 3면).
합의 과정을 보면 더 기가 막힌다. 노조는 임금 100% 보전, 비(非)노조원에 타결금 차등 지급 및 임금 보전 제외 등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했다. 회사 측은 “절대 안 된다”고 맞서다가 결국 노조 요구를 일부 수용해 합의해줬다. 막판에 노조원들의 파업 이탈로 궁지에 물린 노조 집행부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셈이다.
오죽 급하면 그랬겠냐는 동정론이 없지는 않다. 가동률이 10~20%대까지 떨어졌고 파업 지속 시 프랑스 르노 본사가 신차를 배정하지 않겠다는 터라, 공장 정상화가 급선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합의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두고두고 악수(惡手)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을 지킨 비노조원과 회사를 걱정해 파업에 불참한 노조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줘 노노(勞勞) 갈등까지 빚고 있다.
우리나라 노사관계가 세계 최하위 수준인 데는 전투적 노조 탓이 크지만, 분규 때마다 이처럼 미봉과 땜질로 대처해 온 기업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사회적 파장이 큰 대형 사업장부터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기본 중의 기본을 제대로 안 지키는 게 현실이다. 설령 회사 측이 엄정 대응하려 해도 정치권이 중재를 한답시고 개입해 억지 합의를 시킨 사례도 부지기수다. 대형 노조들의 습관성 파업은 “강하게 밀면 밀린다”는 학습효과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자동차업계 임단협이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전운이 감돈다는 점이다. 한국GM 노조는 협상도 전에 교섭장소 변경을 요구하며 오는 19~20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벌인다. 현대·기아자동차 노조는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내놔 언제 파업에 돌입할지 모른다. 현대차 노조는 정년 65세 연장과 순이익 30%를, 기아차 노조는 영업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내놓으라고 한다. 글로벌 자동차업계가 다가오는 미래차 충격에 대비해 실적이 좋은 업체들까지 선제 구조조정에 나서고,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선진국 노사관계가 성숙된 것은 파업 시 대체근로 등 합리적 제도와 무노동 무임금 같은 기본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관행을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등에선 3~5년에 한 번인 노사협상을 한국의 노동법은 매년 하게 해 파업 연례화를 부추기고, 무노동 무임금은 대형 노조의 완력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기 일쑤다. 제도는 경직되고 노사협력보다 투쟁이 더 이득인 한, 노사관행 선진화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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