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한반도는지금] 靑 국가안보실장이란 자리, 그리고 정의용

입력 2019-06-19 08:37   수정 2019-06-19 08:56


‘청와대의 대미(對美) 친화력은 사실상 제로다’. 요즘 외교가에 공공연하게 떠도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 4월 워싱턴 정상회담은 불과 10분 만에 끝났다. 기자들의 질의 덕분에 전체 시간이 그나마 연장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상회담이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만남 그 자체를 중시하는 외교 형식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한·미 정상은 어색함을 여과없이 노출하고 말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는 약 40분 간 ‘대화’를 나눴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는 늘 골프 회동으로 친목을 다진다.

문 대통령은 친미 정서와는 거리가 먼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이 백악관과 거리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다. 문제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마저 미국과의 대화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 실장은 외교관 출신의 통상 전문가다. 열린우리당 시절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직도 수행했다. 국회에선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상임위 활동을 했다. 이력만 놓고 보면, 정 실장은 백악관과 언제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래야할 인물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료는 “정 실장이 백악관에 여러차례 만남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 실장의 백악관 파트너는 존 볼턴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이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3월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최근에 정의용 안보실장이 볼턴 안보보좌관에게 전화를 해서 미국을 방문하겠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있다”며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사실관계를 추궁하기도 했다.

정 실장과 볼턴 보좌관의 공식적인 접촉은 올 4월11일이 마지막이다. 한·미 정상회담 수행단의 일원으로 정 실장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잠시 인사를 나눴다. 정상회담 직전에 문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이끄는 핵심인물을 만날 때도 정 실장이 동행하면서 볼턴 보좌관의 만남이 이뤄졌다. 깊이있는 대화를 나눴다기 보다는 오랜만에 안부를 나누는 정도였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두 사람의 소통은 정 실장이 대북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뒤, 볼턴과 통화한 9월6일 이후 약 7개월만이었다. 2월28일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 이후 정 실장과 볼턴 보좌관의 접촉설이 잇따라 나왔지만, 대부분 무산됐다. 불화설이 나올 때마다 청와대는 전화통화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말로 진화에 나섰다.

볼턴 보좌관은 지난해 4월 등판했다. 대북정책에 관한 한 가장 강력한 ‘매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백악관에 입성한 직후 그가 목도한 풍경은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악의 축’으로 비난했던 북한과 자신이 보좌하는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을 게 자명하다.

미·북을 연결한 중매자는 문 대통령과 정 실장이었다. 특히 대북특사로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온 정 실장의 전언은 영향력이 상당했다. 정 실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말로 백악관을 설득했고, 실제 성공했다. 볼턴 보좌관의 심중엔 이런 의문이 떠올랐을 게 자명하다. ‘김정은이 말하는 비핵화가 도대체 뭐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폐기하겠다는거야?’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끝난 뒤, 미국은 김정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청와대의 말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볼턴 보좌관을 비롯해 미 국무부의 ‘대북 라인’들은 20년 넘게 북한과의 협상 경험을 갖고 있는 베테랑들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작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 지는 올 1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스탠퍼드대에서 강연한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뤄진 그의 강연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강연에서 비건 대표는 “김정은이 지난해 10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 당시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시설의 폐기 및 파기를 약속했다”고 밝혔다.

이 때 비건 대표는 미국의 북핵 관련 입장을 종합 정리한 바 있다. “비핵화 과정이 최종적으로 되기 전에 포괄적인 신고를 통해 미국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전체 범위에 대해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고 했고, “핵심 핵·미사일 시설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접근과 모니터링에 대해 북한과 합의에 도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핵분열성 물질과 무기, 미사일, 발사대 및 다른 WMD 재고에 대한 제거 및 파괴를 담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10월 방북 당시 이 점을 김정은에게 분명히 얘기했을 것이다.

미국은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까지 ‘자체 검증’을 하는데 주력했다. 비건 대표와 그의 일행은 하노이에 가기 직전에 평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하노이 노딜’ 전략은 이때 결정됐다는 게 중론이다.

당시 비건 대표 일행과 접촉한 한 외교 소식통은 “김정은이 말을 뒤집었고, 미국은 김정은이 비핵화와 관련해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폼페이오 장관과 비건 대표 등이 마치 준비된 듯한 원고를 읽어가며, 일사분란하게 회담장을 유유히 떠난 것만 봐도 미국은 이미 노딜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 실장과 볼턴 보좌관과의 소통 창구가 원활했다면, 미국의 이 같은 ‘노딜 전략’은 청와대에 전달됐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실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청와대가 2월28일 파티를 위해 샴페인을 준비하는 일 정도는 막도록 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 밤, 백악관은 청와대와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북핵수석대표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도 ‘깜깜이’였는 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결렬 당일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기자단에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은 경제적 번영이 실제 이뤄지기 전까지는 절대 핵을 폐기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G20(주요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동북아 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일 1박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다. 오사카 G20 회의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할 예정이다. 4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우리 정부로선 중국, 미국, 북한의 의중과 전략을 모두 읽어내야한다. 이번 고차 방정식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라는 답을 도출해내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하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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