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인 인도조약' 반대는 중국에 대한 강한 불신
[ 설지연 기자 ] 홍콩 전역이 반(反)중국 정서로 들끓고 있다. 홍콩 내 범죄 용의자를 중국 본토로 연행할 수 있게 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범죄인 인도법 철회를 외치고 있다. 홍콩 시위는 올 3월 31일 처음 시작됐으며 이달 12일 예정됐던 송환법 심의를 기점으로 격렬해졌다. 지난 9일엔 103만여 명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홍콩 정부엔 비상이 걸렸다. 당초 20일 예정됐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처리를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6일에도 200만 명의 홍콩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캐리 람 행정장관(행정수반)의 사임을 요구했다. 홍콩 인구가 740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시민 7명 중 2명꼴로 시위에 참여한 셈이다.
현지 매체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03년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 때와 같은 저항의 분위기가 홍콩에 퍼졌다”며 “홍콩인들은 자유를 지키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전했다.
시위대 “홍콩 독립성 위배”
이 법안은 중국 본토와 대만, 마카오 등 홍콩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넘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은 영국, 미국 등 20개국과 인도 조약을 맺었지만 중국과는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이 조약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 2월 대만에서 벌어진 홍콩인 살인사건이다. 홍콩법은 영국식 속지주의(영외 발생 범죄 불처벌) 원칙에 따라 타국에서 발생한 살인죄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홍콩 정부는 대만 문제를 다루면서 중국, 마카오 등에서도 용의자를 소환하도록 법안을 정비했다.
그러나 홍콩 야당과 시민단체는 즉각 반대했다.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법을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홍콩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특별행정구로서 2047년까지 사법자율권을 보장받은 곳이다. 홍콩 법조계는 “홍콩 반환 20년이 지나도록 중국 본토와 범죄인 인도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나 실수가 아니다”며 “그만큼 중국 본토의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이 깊다는 증거”라고 반발했다.
오래 쌓인 ‘反중국 정서’ 터져
홍콩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간섭이 나날이 심해지는 것도 시위가 격화한 요인으로 꼽힌다. ‘홍콩의 중국화’를 강행해온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쌓였다는 얘기다. 올초 홍콩 시의회는 ‘국가법’ 제정을 추진했다. 홍콩 내 공식 행사에서 중국 국가가 울려퍼질 때 기립하지 않거나 야유를 보내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다.
외신들도 “이번 시위가 범죄인 인도 법안을 계기로 터졌지만 근본적으로는 반중국 정서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우산혁명 시위가 정부의 양보를 끌어내지 못한 이후 중국 공산당은 홍콩에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분석했다.
홍콩에선 2003년 7월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와 2014년 6월 일명 ‘우산 혁명’ 시위가 있었다. 특히 시위대가 우산으로 경찰의 최루액 분사를 막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우산 혁명은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79일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부는 공공소란죄 등 명목으로 징역형이 선고됐고,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홍콩민족당은 강제 해산됐다.
홍콩 정부는 지난 15일 송환법 처리를 무기 연기한다고 발표했지만 시민 반발을 잠재우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람 장관은 “그동안 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것을 후회한다”며 “사회 각계와 소통을 시작해 더 많이 설명하고 다른 의견도 듣겠다”고 시위대 달래기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법 개정 중단은 ‘적의 공격을 늦추는 계략(緩兵之計·완병지계)’에 불과하다”며 송환법의 완전 철회와 경찰의 과잉 진압 사과, 람 장관 사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NIE 포인트
홍콩 시위의 원인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대규모 시위를 통해 홍콩인들이 진정 지키고 싶어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중국이 홍콩을 ‘하나의 중국’으로 품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보이는 게 바람직할지 토론해보자.
설지연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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