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개인(個人)으로 불리진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지녀야 개인이다. 자신의 고유성이 없다면, 그 인간은 대중(大衆) 혹은 대중의 일부일 뿐이다. 미디어와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같은 뉴스와 이미지를 보고 접한다. 도시와 도시문명은 인간에게 역설적이다. 그 장소는 개인의 최선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훈련장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개성을 잠식하고 대중문화가 의도한 인간으로 동화시키는 미궁이다. 대중은 타인이 전하는 뉴스를 통해 세계를 보고 그것을 통해 형성된 가치체계와 관습을 ‘진리’로 수용한다.
대중(大衆)
대중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감동적인 길과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한 ‘내면의 법’에 의존한다. 바로 개인이다. 사회는 내면의 법에 의존하는 소수의 개인을 혐오한다. 대중은 그 문화를 지탱하고, 그 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인 이익을 최적화한 관습으로 법을 만든다. 그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법’이라는 미명 아래 제거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이 세상의 어떤 원칙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바치는 순교자가 된다. 순교자에겐 명확한 삶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원칙이 있다.
현대문명은 이런 소수들을 격리하고 감금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감시와 처벌》(1975)이란 책에서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순화해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정기관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교정기관은 학교, 교도소, 군대, 정신병원과 같은 것이다. 대중문화를 조장하는 권력자들은 이 소수들을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사회에 적합하게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고취시킨다. 이런 교정기관은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이자 기술이다. 그들은 현대인의 삶을 촘촘히 감시하고 조절하고 연결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현대문명을 이끈다. 20세기 상반기에 일어난 대중운동들은 19세기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소수 권력층에 대한 항거로 시작했다. 독일의 나치스,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당 혁명 등이다. 대중운동을 표방하지만 소수 권력자들의 전략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사회운동이다. 21세기 러시아와 중국은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극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다.
자립(自立)
대중여론의 조작자들과 대중은 자신들의 의도를 알아차려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불순응자’들을 두려워한다. 불순응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 그들은 사회 규범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관을 고민하고 가장 자기다운 삶, 즉 진실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역동적으로 수련한다. 대중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미 정의된 명제나 관습이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불순응자들은 소수의 창조자들로 현실의 모호함을 기꺼이 포용해 그것을 기반으로 만든 개성을 만들어 간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의 법’이 ‘사회집단의 법’보다 상위이며 그들 내면에 존재하는 독특한 자기다움이 모든 사람들이 찬양하는 사회적인 우상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의지, 명료한 시선, 숭고한 생각이 규범이자 교리다. 불순응자는 자신이 어제까지 애지중지한 규범과 교리를 오늘이란 새로운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타인이 그를 반박하기 전에 스스로를 반박하는 역동적이며 모순적인 인간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자립’(1841)이란 글에서 소수의 ‘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적나라한 말로 당신의 생각을 말하십시오. 내일도 다시 적나라한 말로 당신의 생각을 말하십시오. 그 말이 오늘 당신이 말한 모두를 부정할지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사람들은 당신을 오해할 것입니다. 오해받는 것은 나쁜 것입니까?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과 같은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혼들은 모두 오해받았습니다.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오해받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 평론가 콜린 윌슨(1931~2013)은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무의미성이라는 오류’ 안에서 헤매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은 사회 규범 안에서 연명하며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진작시킬 신뢰를 상실하고 좌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회에 순응한다. 자립하는 인간은 고집이 세지만 건전하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자신을 응시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온전하고 스스로에게 정직하다. 그러나 사회에 의존하는 대중은 타인의 모습과 말, 행동에 탐닉한다. 심지어 타인이 먹는 음식과 옷에 열광해 그가 간 음식점을 찾고 그가 입은 옷을 구입한다. 자립하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흠모할 만한 거룩함을 찾지만, 대중은 누구에게나 알려져 흔하고 진부한 대상을 통해 자신의 부러움을 헛되이 찾는다.
■기억해주세요
자립하는 인간은 고집이 세지만 건전하다. 그는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자신을 응시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온전하고 스스로에게 정직하다. 그러나 사회에 의존하는 대중은 타인의 모습과 말, 행동에 탐닉한다. 자립하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흠모할 만한 거룩함을 찾지만, 대중은 누구에게나 알려져 흔하고 진부한 대상을 통해 자신의 부러움을 헛되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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