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人의 60%가 동남아에 거주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닛케이 아시아 리뷰’에 풀어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목타르 리야디다. 인도네시아 최대 중국계 재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리포그룹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자카르타 이주 후 금융업에 손을 댄 그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까지 인도네시아 최대의 상업은행을 이끌었다. 이후 부동산 개발에 눈을 돌려 자산을 축적하고 도·소매업, 의료, 정보통신 및 교육 분야에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아시아의 비즈니스 타이쿤’이 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1950년 인도네시아에 돌아오면서 시작된 내 인생 역정은 막 독립국가로 탄생한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느낌이다. 내가 겪은 성공과 좌절, 위기와 안도의 순간순간에 내 조국 인도네시아도 그것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인생에서 기회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머지는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발표된 비즈니스 잡지 ‘CEO 월드 매거진’의 세계 500대 부호 리스트에 꼽힌 동남아 기업인 28명 중에는 중국계 인사, 즉 화인(華人)이 22명이나 된다. 한국인이 5명인 것에 비하면, 동남아 경제에서 화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화인은 외국에 정착해 거주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5000만~6000만 명을 헤아리는데, 약 60%가 동남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미·중 간 전략적 경쟁관계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동남아의 경제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화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국별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활용함으로써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와 효과적인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50만 명이 넘는 동남아 한인사회의 발전과 한인 비즈니스 네트워크 강화에도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는 오래전에 시작됐다. 11세기 송(宋)나라가 남양무역을 추진하면서 이주가 시작됐고, 15세기 초 명(明)나라 때 정화(鄭和)의 원정으로 더 활발해졌다. 16세기 이후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상인들이 동남아에 진출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중국인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19세기 청(淸)이 쇠퇴하고 서구 열강이 동남아를 식민지화하면서 중국인의 대규모 이주가 촉진됐고 동남아에서의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 활용해야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한 동남아 화인들의 정체성은 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동화의 정도 및 세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태국의 화인은 가장 잘 동화·융합돼 현지 사회와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았다. 탁신 전 총리 같은 정계 지도자도 많이 배출했다. 말레이시아는 제2의 종족(인구의 약 25%)을 구성하고 있어 경제력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하다. 말레이인 우대 정책인 ‘부미푸트라 정책’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리콴유 전 총리의 인민행동당이 1965년 독립 이래 싱가포르를 지배하고 있어 사실상 ‘화인의 국가’라 할 수 있다.
10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화인은 정치적 격동기마다 공격과 견제의 대상이 됐다. 오랫동안 화인의 중국어 교육이 금지되고, 중국식 이름을 갖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화인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포천지의 인도네시아 50대 부호 중 38명이 화인이다. 최근에는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동남아의 화인은 중국인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최근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각국 화인들의 인식과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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