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경제의 블록화와 아베의 노림수

입력 2019-07-17 00:10  

美·中 경제블록 가운데서
선택 강요 당하는 한국에
수출규제 카드 꺼내든 日
AI 관련 경쟁력 갖춘
韓 반도체 미래를 꺾기 위한 것
장기적 관점서 대응해야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아베 신조 일본 정부가 취한 수출규제 보복 조치는 온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는 분노대로 놔두고, 정부와 산업계는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베 총리의 흉중에 있는 노림수와 그 뒤의 숨은 배경을 살펴보자. 먼저, 아베의 보복 조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對中) 무역규제가 한창인 시점에 나왔다. 만약 트럼프가 중국을 상대로 무역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베가 이번 조치를 취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트럼프가 대중 무역분쟁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재선과 관련된 포퓰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베 역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우익 유권자의 결집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행태다.

이런 가시적인 노림수 외에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다. 2000년대 들어 글로벌 경제는 자유무역주의가 점진적으로 퇴조했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화’에 대한 반발로 잠복해 있던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금융위기 이후 78건의 보호무역 조치가 입안됐는데 주요 20개국(G20) 대부분이 이에 편승했다. 현재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당사자 간 경제통합을 포함, 관세동맹이나 서비스협정 같은 지역무역협정은 300건이 넘는다. 이 중 200건 이상이 2000년 이후에 이뤄졌다. 지역 간 합종연횡에 따른 ‘경제의 블록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블록화를 역사에서 찾아보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아픈 기억이 있다. 세계 경제는 1860년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최혜국 대우를 통한 다자 간 협정에 기초해 자유무역주의가 성행했다. 그러나 이후 대부분 국가에서 관세를 높였고, 특히 1929년 미국 대공황 여파가 유럽으로 번지면서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통해 2만여 개의 수입품에 평균 59% 관세를 부과했다. 이 법은 프랑스, 영국 등 다른 나라의 보복관세를 초래해 무역 거래가 급감하고 대공황을 더 심화시켰다. 이에 대한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경제블록화다.

대부분의 블록경제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독자적으로 형성돼 생산을 담당하는 종주국과 원자재를 공급하고 소비를 담당하는 식민지 국가로 이뤄졌다. 영국은 구식민지 국가와 함께 ‘스털링 존’을 만들었고, 프랑스도 구식민지들과 ‘프랑 블록’을 구성했다. 미국은 북미와 남미를 엮는 ‘아메리카 블록’을 형성했다. 블록경제의 특징은 폐쇄성이다. 뒤늦게 열강에 합류해 독자적 경제블록을 이루기 힘들었던 독일과 일본은 이웃 국가를 침공해 새로운 블록을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블록경제를 초래한 산업 및 기술적 특성이다.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증기기관은 내연기관 및 전기로 대체되는 전환점에 있었다. 레이온 섬유가 나오면서 화학산업도 급격히 발전했다. 기술 전환기의 신산업은 막대한 연구개발(R&D) 비용을 대고, ‘경험학습(learning by doing)’에 따른 효율성 제고를 위해 규모의 경제가 불가피했다. 시장 확대가 절실한 상황에서 블록화 경제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다. 산업의 축이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따라 막대한 R&D 비용이 요구되며, 주요 기술은 승자독식의 경쟁으로 특징된다. 이는 곧 글로벌 경제 지도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이 사물인터넷(IoT)과 관련된 5G의 화웨이를 견제하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AI의 핵심 하드웨어는 시스템 반도체다. 삼성이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이 반도체를 겨냥한 보복 조치를 감행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에서 그나마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품목은 AI와 관련된 반도체 하나 정도다. 만약 이것이 아베의 궁극적 노림수라면 이번 사태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블록화 추세가 강화될 경우 우리는 ‘미·일 블록’과 ‘중국 블록’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대응이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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