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週52시간도 벅찬데…"
근로시간 단축청구권 도입
'고용평등법' 법사위 통과
[ 김소현 기자 ]
근로자가 회사에 학업, 자녀·부모 돌봄, 은퇴 준비 등을 이유로 주당 근로시간을 15~30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법으로 보장됐다.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과 최저임금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고용 부담이 가중될 것이란 지적이다.
국회는 지난달 31일 법제사법위원회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고용평등법은 기존에 임신 기간 또는 육아휴직 대신 쓸 수 있는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의 적용 범위와 시간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 사유는 △육아 및 질병, 사고, 고령자 등 가족 돌봄 △자신의 건강 악화 △대학원 진학 등 학업 △55세 이상 근로자의 은퇴 준비 등이 포함됐다. 회사는 대체인력 부재 등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한 주 15~30시간 내에서 근로시간 단축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이 제도는 기업 규모에 따라 2022년까지 차례로 도입된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300인 이상은 내년 1월 △30~300인 미만 2021년 1월 △30인 미만은 2022년 1월부터 적용된다.
경영계에선 “노사 합의로 풀어야 할 문제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정조원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창출팀장은 “근로 단축 요구 시 주 52시간제하에선 기존 인력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며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여당이 근로기준법이 아닌, 고용평등법을 활용해 법안을 꼼수 처리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꼼수 입법으로 근로시간 또 단축…기업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제도는 2011년 첫 법안 발의 후 8년째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노동계의 숙원 사안이었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가중될 것이란 산업계 반발에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좀처럼 개정이 이뤄지기 어려운 근로기준법에 이 내용이 담긴 것도 한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와 여당은 20대 국회에서 입법 전략을 수정했다. ‘배우자 출산 휴가 기간 확대’ 등이 포함돼 여론이 우호적이던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관련 내용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 법안은 야당의 큰 반발 없이 일사천리로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국회 환노위 관계자는 “법안 제정의 취지와 달라 ‘우회 입법’ 논란이 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 1월부터 단축 가능
현재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은 임신한 직장인 여성만 사용할 수 있다. 임신 후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 여성이 신청하면 하루 최대 두 시간을 줄여 일할 수 있다. 출산 후 1년 동안 쓸 수 있는 육아휴직 대신 근로시간 단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사업주는 근로시간 단축을 거부할 수 있지만 법 통과 후엔 거부권이 사라진다.
내년 1월 1일(300인 이상 사업장)부터는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할 수 있는 사유도 늘어난다. 예를 들어 근로자가 대학원 준비를 하거나 대학원에 합격한 경우 주당 근로시간을 15~30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
사업주는 대체 인력 채용이 불가능하거나 사업 운영에 중대한 지장을 줄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불안해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한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만 55세 이상 직장인이 은퇴 준비 차원에서 근로시간을 줄일 수 있는 조항도 담겼다. 같은 시간을 일하고 임금이 줄어드는 임금피크제와는 개념이 다르다. 임금이 줄더라도 짧은 시간 근로를 통해 노후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일본은 가족 간병에만 허용
산업계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기업의 인력 운용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에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기존 인력의 탄력적 운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이미 빠듯하게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기 불황 여파로 가뜩이나 어려운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은퇴나 대학원 진학 준비 등의 사유로 근로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한 조항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한꺼번에 많은 직원이 대학원을 준비한다며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면 특정 부서의 업무가 마비될 우려가 있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노사 관계가 불안한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조에서 이 제도를 오남용해 노사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제도 도입을 위해 우회 입법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은 그동안 남녀고용평등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 차원에서 논의해왔다. 학업과 은퇴 등의 사유로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게 ‘남녀의 고용 평등’에 관한 사항인지 해석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도 한국의 근로시간 단축청구권제도는 기업에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육아와 가족 간병에 한해서만 근로시간을 줄일 수 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소상공인의 피해를 막기 위해 각각 15인 초과, 10인 이상 사업장에서만 시행하고 있다. 한국은 모든 사업장에서 시행할 예정이다.
법안을 발의한 한 의원은 “노동자가 생애주기별 수요에 따라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보편적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현 기자 alp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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