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안 7일 공포…28일 시행
[ 김동욱 기자 ]
2일 오전 10시 ‘노타이’ 차림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총리관저 회의실로 들어왔다. 곧바로 시작된 이날 각의(국무회의)에선 일사천리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이 의결됐다.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은 오전 10시30분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공식 발표했다. 오는 7일 개정안을 공포해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겠다고 정확한 시기도 못박았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일본은 주저없이 한국과의 경제 전면전을 시작한 셈이다.
시행 시기 못박아 협상 여지 없애
이번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지난달 4일 시행된 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3개 소재의 수출규제 강화에 이어 일본이 두 번째로 내놓은 경제보복 조치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첨단소재와 전자, 통신, 센서 등 1120개 전략물자뿐 아니라 목재와 식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이 대상이다. 수출절차가 간략한 포괄허가제에서 일일이 일본 정부의 수출심사를 받아야 하는 개별허가제로 전환된다. 일본 정부가 한·일 간 교역이 이뤄지는 거의 전 품목에 대해 수출 가능 여부를 일일이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파괴력이 큰 전면적인 경제보복 조치로 평가받는 이유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를 중심으로 총 27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지정해왔다. 화이트리스트 국가는 일본이 자국의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군사물품 등을 다른 국가에 수출할 때 허가신청을 면제하거나 간소화한 국가를 말한다. 일본 측의 이번 조치로 2004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 포함됐던 한국은 리스트에서 빠지는 첫 국가가 됐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한국 배제 이유에 대해 “안전보장을 위한 수출관리 제도를 적절하게 운용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만 특정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 우방국이 아니라 적대국에 준하는 취급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일본 정부는 구체적인 화이트리스트 제외 시점까지 제시해 향후 교섭 등을 통한 시행 연기나 취소의 여지도 없앴다. 이 개정안은 주무부처 수장인 세코 경제산업상이 서명하고 아베 총리가 연서한 뒤 형식적으로 일왕이 공포하는 절차를 거친다. 공포한 지 21일 뒤부터 시행된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개정안이 7일 공포돼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이달 중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시행하면서 1910년 한국이 국권을 상실했던 ‘국치일’(8월 29일)은 피해 한국의 국민감정을 조금 덜 자극하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한·일 관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
아베 정권은 한국 측의 거센 반발과 경고,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초강수를 뒀다. 이 배경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에 강경 자세를 보여 국내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피해자 판결을 빌미 삼아 한국이 국제법(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펴며 임기 후반 레임덕 방지와 정권 지지층 결속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기 내에 개헌을 위한 동력으로 한·일 마찰을 부추기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 내에서 커지는 혐한정서에다 일본이 글로벌 주요 강국의 지위에서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발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점도 아베 정권이 강공책을 선택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일본 정부의 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에 대해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 여론조사에선 ‘찬성’ 의견이 58%로 ‘찬성하지 않는다’(20%)를 압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강경 일변도 정책에 대해 일본 내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교도통신은 “징용피해자 보상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 간 대립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는 양국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도 “한·일 간 대립이 한 단계 더 심각한 상태로 빠졌다”고 전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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