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 끼고 수백채씩 사들여
대출 더 받으려 '업계약'도 성행
[ 양길성/전형진/윤아영 기자 ]
연립·다세대주택(빌라) 시장에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제도를 악용한 ‘갭 투자’ ‘업 계약’ 등이 횡행하고 있다. 서민주거 안정을 위해 마련한 정부의 전세자금 대출제도가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빌라 분양 시장에서 전세보증금을 실제 거래액보다 부풀려 계약하는 업 계약이 늘고 있다. 계약서에 적힌 전세보증금이 높을수록 전세자금 대출금액이 커지는 까닭이다. 갭 투자자들은 세입자의 전세금을 활용해 쉽게 빌라 매입에 뛰어들고 있다.
빌라분양업체들도 전세대출을 받은 세입자를 미리 확보한 뒤 분양에 나서고 있다. 빌라 한 가구를 2억원에 분양할 때 1억8000만원에 세입자를 구한 뒤 나머지 2000만원을 낼 구매자를 찾는 식이다. 실수요보다는 갭 투자 행위를 부추기는 구조다. 전세자금 대출이 급증하면서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오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지난해 연 1~2%대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상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2017년 말 발표한 ‘주거복지 로드맵’ 후속 조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주택도시보증공사 등 보증기관 세 곳이 보증한 전세대출 잔액은 지난 3월 기준 64조7000억원으로 4년 만에 세 배 늘었다.
전셋값과 매매가격의 갭(차이)이 줄어들자 전세를 끼고 수백 가구의 빌라를 사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시세차익이 크지 않은 빌라의 특성상 여러 가구에 투자해야 임대료를 올릴 때 돌아오는 수익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리한 투자로 현금흐름이 막히면서 세입자에게 피해가 가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자금 대출은 서민주거 안정을 위해 필요한 제도지만 대출이 과하게 이뤄지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며 “빌라 공급이 많은 지역에선 전세금 하락으로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빌라시장마저…'갭투자자 놀이터' 전락
연립·다세대 주택(빌라)이 빼곡히 서 있는 경기 광명시 광명동의 한 비좁은 골목. 7일 찾은 이곳에는 ‘신축빌라 분양, 실입주금 1000만원부터’라고 적힌 전단지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전화를 걸자 분양업자는 전세보증금을 끼고 매매하는 ‘갭 투자’를 권했다. 그는 “빌라 한 가구 분양가격이 1억2500만원인데 세입자 전세보증금(1억1500만원) 빼고 1000만원만 내면 된다”며 “전세대출이 보증금 80%까지 나와 세입자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대표적 서민주거 공간인 빌라 시장에 정부의 저금리 전세대출 제도를 활용한 갭 투자가 횡행하고 있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 간 차이가 작아 정부가 제공하는 전세대출로도 얼마든지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세자금 활용한 갭 투자 횡행
빌라 갭 투자가 활발한 곳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 금천구 가산동 등 소규모 빌라 밀집촌이다. 갭 투자자는 지난해 9·13 대책으로 아파트 투자 수익이 급감하면서 상대적으로 규제가 적고 투자금액이 낮은 빌라 시장으로 몰려든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자금대출이 손쉽다 보니 전세보증금을 실제 거래액보다 높이는 ‘업 계약’ 행위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실제 전세가격이 1억원이라면 계약서에는 1억2000만원으로 적는 식이다. 계약서에 적힌 전세보증금이 높을수록 전세대출이 더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는 자기 돈 한 푼 없이 은행을 통해 전세보증금을 100% 조달할 수 있다. 빌라 투자자는 매매 시세와 근접한 수준으로 계약된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매입할 수 있게 된다. 전세자금대출로 투자자, 세입자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거래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신축 빌라분양 시장도 전세 세입자를 끼고 분양하는 방식이 관행이 됐다.
이렇다 보니 전세가격은 계속 오르는 추세다.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거래도 나타나고 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내역에 따르면 2013년 준공한 화곡동 한 빌라(전용면적 27㎡)는 지난달 1억3000만원에 전세거래됐다. 올 1월 매매가(1억1500만원)보다 1500만원 비싸다. 가산동에서는 5월 2억500만원에 손바뀜한 빌라 한 가구(전용 29㎡)가 같은달 2억1000만원에 전세거래됐다. 화곡동 J공인 관계자는 “전세가격을 높여 계약하면 집주인은 전세 만기가 끝난 뒤 더 비싼 가격에 전세 세입자를 받을 수 있다”며 “세입자와 집주인 모두 전세를 선호하다 보니 집값보다 전세가격이 더 높게 형성된다”고 말했다.
“느슨한 전세대출…전셋값만 올려”
현재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의 주택담보 대출은 매매가의 40%에 그친다. 반면 전세보증금대출은 보증금의 최고 80%까지 지급된다.
전세대출은 금리도 낮다. 정부는 2년 전부터 연 1~2%대 저금리 전세자금대출 상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신혼부부 전용 전세자금’은 혼인 5년 이내 신혼부부에게 전세자금을 연 1.2~2.1% 금리로 제공한다. 지난해 6월 출시한 ‘중소기업취업청년 전월세보증금대출’은 금리가 연 1.2%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보증기관 세 곳이 보증한 전세대출액은 크게 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민 신한 등 5개 은행의 보증부 전세대출 잔액은 지난 3월 기준 64조7000억원으로 2015년(21조2000억원) 대비 약 세 배로 급증했다. 빌라 개발업체인 가나건설의 탁현정 이사는 “전세자금대출 제도 활성화로 전세 수요가 대폭 늘면서 전셋값이 최근 크게 올랐다”고 설명했다.
깡통빌라 속출…“세입자만 피해”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전세대출 관행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깡통 빌라’가 속출할 것으로 우려한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투자지원센터장은 “갭 투자자가 당분간 전세자금대출로 전세 물건을 돌리고 있지만, 매매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는 빌라 시장 속성상 전세보증금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할 가능성이 크다”며 “사고가 나면 피해는 고스란히 세입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서울 강서 양천 일대에선 빌라 280여 가구를 보유한 강모씨가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강씨는 대리인을 앞세워 “자금흐름이 막혀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법원 경매로 넘어가는 빌라도 늘고 있다. 법원경매 전문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국 연립·다세대 주택의 경매 건수는 9782건으로 2년 전(7152건)보다 36.8% 급증했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신축 빌라는 준공 2~3년이 지나면 대부분 가격이 주변 시세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전셋값이 지나치게 높은 집은 거래 시 유의해야 한다”며 “거래 전 등기부등본에서 근저당 등 채무 관계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길성/전형진/윤아영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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